레지스 여정 이야기

챕터 1


병원에는 죽음의 냄새가 감돌았다.


"넌 피가 필요해, 레지스."


"난 시간이 필요하고."


"이자들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야."


"내 손으로 죽이진 않을 거야."


환자들의 신발 근처에는 차디찬 바람에 얼어 딱딱해지고 피에 물들어 붉게 변한 붕대가 버려져 있었다. 붕대를 치워줄 사람도, 불을 켤 연료를 가져다줄 사람도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디틀라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내 결정을 존중해 줘."


"네 고집 때문에 우리 둘 다 위험해질 수 있어. 지금의 넌 약해진 상태인데,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고."


"윤리적 문제는 차치하고." 레지스가 말을 이어갔다. "네 본성 때문에 우리가 곤경에 빠진 거야. 우린 이미 주변의 시선을 끌었어. 흡혈당한 시체를 따라오면 우릴 추격하기 쉽겠지. 그러니 잠시만 내 말대로 해 줘."


"뭘 어쩌려고?"


"사람들 사이에 숨자. 위장하는 거지."


"인간들 사이로? 그건... 치욕적인데." 디틀라프가 불편하게 몸을 움직이며 망토 아래의 상처를 잡고 고통스럽게 말했다.


"상처가 곪았어." 레지스가 뭔가 알아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 상처가 곪았다고? 변신하려다 조금 더 찢어졌을 뿐이야. 말이 안 되잖아. 고작 인간 따위한테..."


"아니, 인간이 아니야. 위쳐였지."


디틀라프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동료를 쏘아봤다.


"위쳐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돌연변이야. 다른 천구에서 온 방문자들로부터 이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부르는 용병 같은 거지." 레지스가 설명했다.


"그 방문자 중에 우리도 포함되는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위쳐들은 수백 년에 걸쳐 적으로 간주되는 괴물들에 관해 막대한 정보를 수집했어. 넌 그런 전문가를 직접 만난 셈이지."


"그러니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디틀라프는 자신의 동료가 한 말을 곱씹었고, 장고 끝에 턱을 씰룩이며 말했다. "네 말대로 하지."


커다란 천이 바스락거렸고, 흡혈귀들은 텐트의 입구를 노려봤다. 멜리텔레의 시종이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신사분들, 이제 말씀하셔도 돼요.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기 남은 사람이 저밖에 없거든요. 다른 자매님들은 군부대를 따라 비지마로 갔어요."


"환자들을 이렇게 차디찬 곳에 버려두고요?" 레지스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왜 그리 급하게 움직인 거죠? 전쟁은 끝났고 닐프가드는 브레나에서 패했는데."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받아야 할 봉급이 6개월이나 밀린 상태였거든요. 군부대가 반란을 일으키겠다며 협박할 정도였죠. 결국 병사들은 순경에게 수도로 안내하도록 강요했고, 거기서 밀린 봉급을 받아냈어요.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맹세했는데, 항상 기분 좋고 배부른 날만 있진 않더라고요."


"그렇게 충분한 물자도 없이 버려진 병원이 된 거군요."


"다행히 순경님께서 자신의 개인 텐트를 내주셨어요. 바로 이 텐트죠. 그리고 사비를 털어서라도 식량과 의약품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요. 많진 않지만, 두 분께 드릴 만한 식량은 있답니다. 뭐라도 좀 드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레지스가 미소를 띤 채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하지만 저희는 괜찮습니다. 대신 하나만 여쭤보죠. 혹시 이 근처를 지나가는 여행자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물론 도로에 괴물이 출몰하는 요즘 같은 시기엔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아침에 병사 세 명이 왔어요. 부상당한 사람이 자신의 지휘관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서쪽으로 갔죠. 그래도 다시 만나서 다행이에요. 또 다른 불행한 영혼이 구원받았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잠시 후, 레지스와 디틀라프는 야전 병원에서 나왔다. 발톱 자국이 새겨진 느릅나무 사이로 서쪽으로 향하는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저들을 찾아오는 사람은 없을 거야." 디틀라프가 말했다. "저렇게 잊히겠지. 결국 인간이잖아. 기억력이 좋지 않거든."


"그래도 저 여자는 남아 있겠지." 레지스가 답했다.


텐트 위로 까마귀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챕터 2


눈이 그쳤다.


어스킨은 눈을 비비고 눈앞에 펼쳐진 소든 평야가 황혼에 물들어 가는 걸 바라봤다. 그는 지금쯤 멈추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두 동료에게 길에서 벗어나서 근처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라고 신호했다.


네리스는 배낭을 풀고, 담요와 식량을 꺼냈다. 오샨은 불을 지폈다. 어스킨은 썰매 줄을 놓고, 앉아서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곧 도와줄게." 어스킨이 말했다.


네리스가 썰매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


"망할 지휘관 놈." 오샨이 손에 입김을 불며 말했다. "대체 뭘 이렇게 많이 처먹은 거야? 좀 가벼웠으면 이미 이나를 지나고 있었을 텐데."


"운도 좋지." 네리스가 말했다.


어스킨이 붕대를 두른 지휘관에게 몸을 기울이자 지휘관의 힘없는 호흡 소리가 들렸다. "우리끼리 어떻게든 버텨야 해." 어스킨이 말했다. "내가 초번을 설게."


*


훔친 포도주에서는 생강 맛이 났다. 어스킨은 표정을 찡그리며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잠에 빠진 동료들을 바라봤다. 오샨은 어스킨에게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흑종들이 침공하기 직전에 테메리아군에 입대한 오샨은, 어스킨과 함께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존 나탈리스의 지휘 아래 딜링겐에서 함께 싸웠고, 폴테스트 왕과 함께 소든의 해방을 위해 전투를 벌였다. 자유 병사단의 용병 대장인 네리스는 자신이 리리아에 있는 남작의 딸이라고 했다. 어스킨은 그게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네리스가 정말 남작의 딸이라면, 거의 얼어 죽을 것 같은 이 미친 여정에 함께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 이 여정..." 어스킨은 한숨을 내쉬고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모든 건 지휘관과 지휘관이 해 준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잔해로 가득한 지하에 있는 상자. 이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다 함께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모닥불의 온기가 어스킨을 꿈나라로 부르고 있었다. 어스킨은 하품을 하고 일어나서 신발 앞코로 네리스를 쿡쿡 찔렀다. "네 차례야." 어스킨이 포도주병을 건네며 말했다. 네리스는 눈을 비비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모닥불을 향해 뱉어냈다. 어스킨은 생강 맛에 대해 말하려다 네리스가 자기 뒤쪽의 어두운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걱정 마." 야영지 근처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 말했다.


잠시 후, 두 명의 낯선 자가 모닥불의 빛이 비치는 곳으로 걸어 들어왔다. "우린 무장하지 않았어." 회색 머리 남자가 말했다. 방금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우린 딜링겐으로 가는 중이야. 요즘같이 다사다난한 시기엔 길동무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 어차피 목적지도 같은데."


"목적지가 같다는 걸 어떻게 알지?" 어느새 잠에서 깬 오샨이 등 뒤로 단검을 뽑은 채 말했다.


"우린 길동무 따윈 필요 없어." 네리스가 말했다.


어스킨은 침묵을 유지한 채 상황을 보고 있었다. 새로 나타난 자들이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일단 정말 비무장인 것처럼 보였다. 또한 쇠약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조금은 아파 보였다. 회색 머리 남자는 피부가 죽은 사람같이 창백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입을 열지 않은 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였고, 구부정한 자세로 엉덩이 쪽을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다친 지 얼마 안 된 건가?"


회색 머리 남자는 썰매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남자는 일주일도 못 버틸 거야. 하지만 다행히 내가 의사거든. 딜링겐에 피난처가 있어. 서두른다면 내가 치료해 줄 수도 있지."


바람이 다시금 불어와 나뭇가지를 흔들고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렸다.


어스킨은 네리스와 오샨이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스킨은 고민 중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지휘관이 죽어버린다면, 이 여정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의사는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스킨은 칼자루를 놓고 투덜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름은 어떻게 되지?"


*


새벽이 되자, 이들은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어스킨은 새로 생긴 동료들을 관찰하며 재만 남은 모닥불을 발로 비볐다. 회색 머리 남자, 레지스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레지스는 간신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손쉽게 지휘관의 붕대를 풀고 상처에 새롭게 압박 붕대를 감았다. 그의 동료인 디틀라프는 놀랍게도 썰매를 끌겠다고 자처했다.


이들은 계속 움직였다. 하지만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디틀라프가 고통에 신음하며 멈춰 섰다. 레지스는 그런 디틀라프를 지탱해 주었다. 어스킨은 배낭을 고쳐 메고 이들에게 다가갔다.


"몸 상태가 꽤 안 좋군." 어스킨이 말했다. "누구와 싸우다 이리된 거요?" 새로운 동료들은 답하지 않았고, 디틀라프는 누가 따라오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어스킨의 어깨 너머로 걸어온 길을 바라봤다. 어스킨은 답변을 강요하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모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챕터 3


"끔찍한 괴물이 저희 종탑에 자리 잡았습니다, 마스터 위쳐. 밤만 되면, 도시를 날아다니며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납치한 뒤에, 자신의 소굴로 끌고 와서 잡아먹습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지요! 이 골칫거리를 제거하려면 얼마가 필요할까요?"


"200 오렌은 필요합니다, 의원님. 다른 괴물도 아니고 흡혈귀니까요."


의원이 감명받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벌써 그 괴물의 존재를 알아내셨군요?"


"시체를 조사해 봤습니다."


소렌슨은 자신이 마을 의원보다 훨씬 높은 사람의 명에 따라 그 야수를 오랫동안 추적해 왔다는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는 흔적을 따라 월푸르트 마을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이미 자신이 보수를 받고 있는 일에 다시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 굳이 거절해서 이들을 실망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의원은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비싸군요."


"그럼 직접 잡으시지요."


"물론 해 봤습니다. 성의 경비병으로 복무하는 용감한 소년들이 직접 나섰지요. 하지만 놈에게 강철은 소용이 없더군요. 그래서 종탑에 불을 피워서 그 괴물을 몰아내려고 했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지금껏 사원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종탑의 검은 기둥을 슬프게 바라보던 원로 목사가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신성한 곳에 불을 지르겠다니! 저 종탑에 교회의 성금이 자그마치 3000 오렌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을 지르겠다고요?"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의원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저 괴물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소리를 지르시다니요?"


"찬송가가 우릴 보호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화내며 말했다. "찬송가만 있다면, 마녀의 주술 따위는 무용지물입니다."


신도석에 모인 어린 성가대원들은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단조로운 찬송가는 향냄새처럼 사원의 신성한 벽에 스며들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소렌슨은 생각에 빠졌다. "목사님." 소렌슨은 고개를 숙이며 성직자에게 말을 건넸다. "믿음과 신성한 찬송가는 흡혈귀를 상대할 때 아주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괜찮다면 성가대원들을 데려가도 될까요? 기도를 올리면 괴물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고, 놈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사이에 제가 놈에게 다가가서 일격을 날릴 수 있겠죠."


목사는 기세등등하게 마을 의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그렇게 하시지요."


*


미끼는 쓸모가 있었다. 검은 하늘을 날던 흡혈귀가 자신들 사이에 떨어지자, 찬송가를 부르던 성가대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댔다. 놈은 눈이 없고 박쥐 날개를 달고 있었으며, 매끄러운 피부 속 정맥에는 피가 요동치고 있었다. 틀림없이 가라샴 분파였다.


괴물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성가대원을 들어 올리더니 송곳니를 찔러 넣었고, 가늘고 긴 발톱이 달린 발로 다른 성가대원을 짓눌렀다.


먹이를 먹고 있는 흡혈귀는 행복에 취해 감각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공격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가고일 석상 뒤에 숨어 있던 소렌슨은 투수가 던진 원반처럼 몸을 웅크린 채 뛰쳐나갔다. 사슬이 허공을 빙빙 돌더니 그 연결부가 괴물의 사지를 휘감았고, 은 사슬에 닿은 피부는 쉬익 소리를 냈다. 가라샴 분파의 흡혈귀는 쓰러졌고, 사원의 미끄러운 지붕을 타고 굴러서 아래 있는 자갈길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곧 지붕 타일들이 놈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위쳐는 바닥에 떨어진 괴물을 추격했다.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었다. 소렌슨은 은검을 뽑아 사슬에 묶인 채 버둥거리는 괴물의 목에 찔러넣었다.


거대한 박쥐의 형체에서 분수처럼 피가 쏟아져 나왔다. 검날은 돌에 부딪쳤고, 사슬은 느슨해졌다. 구속에서 벗어난 흡혈귀는 살점과 같은 형태로 변했고, 날개를 움직여 귀를 찢을 듯한 괴성과 함께 날아올랐다. 소렌슨은 분노한 괴물의 돌진을 피하기 위해 뛰어올랐고, 어깨를 땅에 부딪치며 구르다 무릎을 꿇었다. 위쳐가 석궁을 꺼내 들자, 무기에 달린 용수철이 딸깍 소리를 냈다. 소렌슨은 흡혈귀를 겨냥하고 활을 발사했다. 활에 맞은 흡혈귀는 공중에서 비틀거리다 힘겹게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이내 우레와 같은 놋쇠 소리와 함께 종탑으로 떨어졌다.


위쳐는 사냥감을 추격했다. 그는 석공 옆에 있는 승강기 밧줄을 잡고, 검을 휘둘러 무게추를 잘라냈다. 그러자 벽돌이 떨어졌고, 소렌슨은 그 힘을 이용해 곧바로 종탑 꼭대기에 도착했다.


종탑 꼭대기에 오르자 달빛에 비친 괴물의 형상이 서쪽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소렌슨은 욕을 내뱉었다.


챕터 4


바람결에 실려 약초 향기와 말린 고기 냄새가 밀려왔다. 레지스는 걸음을 멈췄다.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있군."


디틀라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이미 사흘 동안 야루가 강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인간 길동무들은 아직도 레지스와 디틀라프를 경계하고 있었고, 가능하면 이들을 피하며 최소한의 대화만 나눴다. 흡혈귀들은 이들의 몇 걸음 뒤에 있었다.


"참 흥미로운 길동무들이야." 디틀라프가 말했다. "여사제는 이들이 병사라고 했는데... 이들에게선 공포와 기만밖에 안 보이잖아."


"탈영병이야."


"그걸 어떻게 알지?"


"추측이야. 저 부상당한 사람... 외투의 휘장이 지워져 있더군."


"그러니까 인간들 사이에 숨자는 의견이 너저분한 탈영병들과 함께하자는 얘기였나? 완벽하군."


"그래, 결과만 보면 그렇게 보이겠지. 정말 뻔한 말이라서 미안하지만, 인간들 사이에 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그 어떤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이들이 누구인지, 왜 도망치는지도 몰라. 누구한테서 도망치는지도 그렇고. 아는 게 없지."


오샨이 팔을 흔들며 숲 경계에 있는 작은 농장을 가리키자, 신호를 본 일행은 멈춰 섰다. 울타리 옆에 허름한 수레가 세워져 있었고, 마구간에서 말들이 울고 있었다. 이들을 따뜻한 난로로 부르기라도 하듯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흡혈귀들은 새로운 길동무들이 잠시 상의하더니 길을 떠나 건물로 향하는 것을 바라봤다.


"그래, 저들에 관해 아는 게 없긴 하지." 디틀라프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 것 같군."


*


술통을 들고 돌아온 농부는 탁자에 앉아, 점토로 빚은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곧 방 안에 맥주 향이 퍼졌다. "죄송하지만, 이해가 잘 안 되네요." 농부가 말했다.


어스킨은 맥주를 들이켜고 수염에 묻은 거품을 닦아낸 뒤, 탁자 위의 백합 조각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아, 그렇습니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희는 테메리아군 소속으로,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닐프가드군에 몸값을 지불하고... 이 포로를... 데려오는 거죠. 최대한 빨리 이나를 가로질러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마차를 빌리려는 거고요."


"말 두 마리도요." 오샨이 말했다.


네리스는 벽에 등을 기대고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검을 뽑아 들어 마룻바닥 사이에 꽂고 있었다. "그리고 식료품 저장소에 있는 것들도요." 네리스가 덧붙였다.


"말도 안 됩니다. 이곳은 수도와 정말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마차도 없이 저희가 어떻게 겨울을 버티란 말씀이십니까?"


"저희?" 오샨이 물었다. "또 누가 있나?"


농부는 문을 쳐다봤고, 오샨은 침을 뱉은 뒤 단검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뒀다. 아궁이의 불빛이 검날에 반사돼 번뜩였다.


"이러지 마시고, 제발 자비를..."


"우린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굳이 이유를 알고 싶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오샨..." 네리스가 말했다.


"닥쳐. 알아서 선택하겠지."


지금껏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디틀라프가 탁자로 다가오더니 탁자 위로 주머니를 하나 던졌고, 주머니 속의 동전이 짤랑거렸다. "당신 몫이오." 디틀라프가 말했다. "난 잠시 산책 좀 하고 오지."


문이 쾅 닫히자, 레지스가 주머니에 동전을 주워 담으며 농부에게 다가갔다. "제 동료들은 도둑이 아니라 병사입니다." 레지스가 오샨의 눈을 보며 말했다. "썰매를 끌고 가야 하니 말 한 마리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드리죠."


어스킨은 입을 벌렸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해 말을 더듬었다.


흡혈귀는 입을 오므리고 미소를 지었다. "테메리아 병사들은 당신의 물건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레지스가 말했다. "그랬다간 이 비밀 작전이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 음... 아주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겠죠."


*


에인은 부츠 밑에 나뭇가지가 있는 걸 느꼈다.


그녀는 눈을 흩뿌리며 불쏘시개를 찾아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이미 나뭇가지를 충분히 모았기에, 에인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그녀는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숲 어귀에 이른 에인은 바구니를 떨어뜨리고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나무 뒤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천천히 나무 밑동 위로 고개를 내밀어 오두막을 바라봤다.


오두막에는 낯선 자들이 있었다. 한 여자가 루드카에게 고삐를 채워 끌고 가고 있었으며, 루드카는 계속해서 푸르릉거리며 발길질을 해댔다. 식료품 저장소에서는 두 남자가 두 손 가득 음식이 담긴 자루와 통을 들고나왔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네 번째 사람은 오두막에서 에인의 아버지에게 말하고 있었다.


에인은 근처에 누가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도 훨씬 가까이에 말이다.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을 거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낯선 자는 에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차갑고 창백한 손이었고, 손바닥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네 아버지는 괜찮을 거야. 놈들은 이제 곧 떠날 거거든. 자, 잘 봐둬. 너희 족속들의 세상엔 쉬운 게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신경 쓰지 마."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에인은 회색 머리 남자가 자기 지갑에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아버지의 손아귀에 넣어 주는 걸 봤다.


"루드카만 데려가는 건가요?" 잠시 후 에인이 물었다.


"그래, 내 친구가 설득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그럼 다행이네요."


"다행? 운이 좋았던 거지. 놈들은 너희 집을 약탈하려 했어."


에인은 몸을 돌려 낯선 자의 눈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렇게 우릴 지켜 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챕터 5


석양이 남긴 마지막 햇빛으로 이나강이 반짝였다.


강 앞에는 비도르트와 카르카노 요새가 있었다. 전쟁 중에 불타버리긴 했지만, 테메리아군은 이 요새를 천천히 재건하고 있었다.


오샨은 일행의 주의를 북쪽으로 돌렸다.


"저기." 오샨이 말했다. "얼음이 두 해변을 이어 주고 있어. 저기로 가도록 하지."


어스킨은 손가락 사이로 코웃음 치며 말했다. "별로 좋은 생각 같진 않은데. 얼음이 얇은 곳이 있으면 어쩌게? 게다가 구멍이 파여 있을 수도 있고, 요새도 너무 가까워. 이나 쪽으로 가다가 트라바 쪽으로 빠지는 게 나을 것 같아. 한적한 여울이 있으면 말해 줘. 지휘관을 옮기기엔 그쪽이 더 수월할 테니까."


"지휘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레지스가 말했다. "정말 지휘관 친구를 살리고 싶은 거라면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가장 상식적인 방법은 카르카노에서 도움을 구하는 거지. 거기라면 의약품이 충분할 테니까. 하지만 그러긴 싫겠지?"


"그래, 그건 좀 안 내키네." 어스킨이 말했다. "안 그래도 거절하려고 했는데."


디틀라프가 웃으며 말했다. "뭐 문제라도 있나, 테메리아 병사 양반? 같은 부대니까 도움을 받지 그래?"


"거기, 똑똑하신 분." 오샨이 말했다. "우리가 네가 누군지 물어본 적 있나? 어디 출신인지 말이야. 아니면 네가 시체처럼 생겼다고 놀리기라도 했나?"


디틀라프는 침묵했다.


"그럼 펜 카른으로 가지." 레지스가 말했다. "거기에 여름용 별장이 있었는데, 아마 쓸만한 게 좀 있을 거야."


"정신이 나갔나, 의사?" 어스킨이 말했다. "우린 그 저주받은 엘프의 땅으로 갈 생각따윈 없어. 지휘관한테 안 좋을 거라고? 그럼 빨리 여기, 이나를 지나가자고. 그다음엔 딜링겐으로 향할 거야."


*


일행은 먹구름이 가득한 다리로 향했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한 침묵만이 이어졌다.


그렇게 무사히 지나가나 싶었을 때,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오샨이 욕을 내뱉었다. "기수 셋. 무장한 정찰병이야."


테메리아군은 일행을 똑바로 바라봤다. 한 명은 말에 박차를 가하더니 요새 쪽으로 달려갔고, 둘은 해변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두 병사는 말에서 내리더니 칼을 뽑아 들고 얼음판으로 뛰어왔다. "정지!" 병사들이 외쳤다. "정지!"


썰매를 끌던 말은 푸르릉 소리를 내더니 이내 멈춰 섰다.


"움직여, 멍청한 말 같으니!" 어스킨은 소리를 지르며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테메리아 병사들은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어느새 얼굴을 구분할 수 있을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레지스는 디틀라프를 바라봤다. "협상을 해 보지."


오샨은 침을 뱉더니 새총을 발사했다.


휙 소리와 함께 투사체가 날아가더니 병사의 투구에 명중했다. 돌에 맞은 병사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얼음 위에 쓰러졌다. 그러자 다른 병사가 일행 중 가장 가까이에 있던 네리스에게 달려들었다. 네리스와 병사는 싸움을 벌이다 중심을 잃고 근처의 구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네리스!" 어스킨은 고삐를 내던지고 구멍 쪽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오샨이 어스킨의 팔을 잡았다. "이미 늦었어!" 오샨이 소리쳤다. "도망가야 돼!"


레지스는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안개 낀 물속으로 뛰어들어 용병 대장을 찾아냈다. 네리스는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테메리아 병사와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병사의 방어구 때문에 둘 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네리스는 숨을 몰아쉬며 병사를 걷어찼다. 레지스는 깊이 잠수하며, 갓 재생된 몸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네리스를 잡은 채 위로 끌어 올렸다. 레지스는 어깨가 탈구되는 걸 느꼈다. 하지만 레지스는 이를 악물고 다시금 네리스를 끌어 올렸다. 뼈가 깨지며 고통이 밀려오는 바람에, 레지스는 잠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때 디틀라프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디틀라프는 레지스를 옆으로 밀어 두고, 양손으로 용병 대장과 테메리아 병사를 하나씩 붙잡았다. 그러고는 둘을 떼어놓은 뒤 재빨리 물 위로 끌어 올렸다.


*


이들이 이나강 옆의 자갈밭으로 기어 올라왔을 때, 어스킨과 오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강가 요새에서는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레지스는 네리스가 쓰러지지 않게 도와주려 했지만, 그녀는 도움을 거부하고 최대한 빠르게 숲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레지스는 네리스를 따라가며 고개를 돌려 병사를 끌고 있는 디틀라프를 바라봤지만, 디틀라프는 이내 나무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네리스와 레지스는 숲속을 가로지르며 계속 달려 나갔고, 펜 카른의 언덕에 도착하자 지쳐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네리스는 이곳에 얽힌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며 움직이기엔 너무나 피곤한 상태였다.


결국 네리스와 레지스는 소박한 내부 구조의 오두막을 찾아냈다. 탁자 위엔 병이 줄지어 있었고, 벽에는 말린 약초가 걸려 있었다. 약초 향이 네리스의 코를 간지럽혔다.


레지스는 난장판 속에서 마른 옷을 찾아냈고, 네리스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탁자 위의 병을 보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당신 오두막인가?" 네리스가 물었다.


"그래." 레지스가 어깨의 통증 때문에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여기 있군."


둘은 밖으로 나가 모닥불 옆에 앉았다. 레지스가 모닥불에 불을 붙였다. 레지스는 플라스크 위의 먼지와 거미줄을 닦아내고, 코르크 마개를 뽑은 다음 네리스에게 건넸다.


한 모금 들이켜자, 알코올이 그녀의 목을 타고 내려가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어우... 이거 뭐지?"


"맨드레이크 혼합물."


"줘?"


"괜찮아. 난 금욕주의자라서."


"금욕주의자가 밀주업이라니... 게다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낯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들고... 당신 정말 독특한 사람이네, 레지스."


"음... 예전에 자신을 구제 불능 이타주의자라 부르는 드워프를 만난 적이 있지. 아마 나도 좀 그런 거 같군."


침묵이 이어졌다. 네리스는 레지스 뒤에서 깜빡이는 그림자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네리스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네리스는 뻣뻣하게 굳은 채 나지막이 탄성을 내질렀다.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 당신..."


"그래, 맞아."


네리스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가렸다.


레지스는 잉걸불에 장작을 조금 더 던져 넣었다. "진정해. 말했잖아, 난 금욕주의자야. 그리고 널 해치려 했으면, 그냥 가라앉게 내버려 뒀겠지."


"디틀라프도?"


"그래, 디틀라프도.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불이 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러자 소환이라도 한 것처럼 어둠 속에서 디틀라프가 나와 네리스와 레지스 사이에 앉았다.


"그 테메리아인도 죽진 않을 거야." 디틀라프가 말했다. "요새 장벽까지 데려다 놨으니, 부대원들이 찾아내겠지."


네리스는 떨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했다. 레지스의 옷이 네리스의 몸을 간지럽혔고, 바지는 너무 커서 엉덩이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리스는 바지를 끌어 올리고 벨트를 최대한 졸라맸다.


"어디 불편한가?" 디틀라프가 물었다.


네리스는 잠시 망설이다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술을 들이켠 뒤 미소 지었다.


"아니." 네리스가 말했다. "아무 문제 없어."


챕터 6


마을 의원은 숨을 헐떡이며 종탑을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경고해 줬기에, 그는 향기로운 손수건으로 코를 누른 채 막고 있었다. 소렌슨은 이미 현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흡혈귀 둥지에는 부패가 진행 중인 시체가 즐비했다. 하지만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도 위쳐의 조사를 막지는 못했다.


"돈은 말 옆에 뒀습니다, 마스터 위쳐. 원로님께서 최대한 빨리 도시를 떠나 달라고 하시더군요."


위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손으로 흡혈귀의 송곳니에 당한 상처의 간격을 측정했다. "이상하군요. 물린 자국을 보면, 두 턱의 형태가 서로 다릅니다. 가라샴 분파의 흡혈귀는 피해자를 여기로 데려와서, 피해자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척추를 부숴버렸습니다. 어린 새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 새처럼 말이지요."


마을 의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죠?"


"누군가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


"사브리나."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마법통신기는 먹통이었고, 소렌슨은 이 말하는 상자를 강에다 집어 던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소렌슨은 답을 들어야 했다. 결국 호기심이 짜증을 억눌렀고, 그는 다시 시도했다.


"사브리나, 멍청한 여자 같으니."


"소렌슨, 정말 정중하기 짝이 없네." 기계에서 나온 금속 느낌의 목소리가 답했다. 말은 불안한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속도를 줄였다. 위쳐는 말에게 박차를 가했다.


"나한테 거짓말을 했더군."


"그래?"


"흡혈귀가 둘이더군. 비용도 두 배로 받아야겠어."


"그것 때문에 날 귀찮게 한 거야? 흥정이나 하려고?"


"네가 찾는 도망자들의 정체를 알고 싶어. 어떻게 도망치고 있는지도 그렇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게 우리 조건 아니었나?"


"위험 부담이 증가했잖아. 내가 누굴 상대하는지 알아야겠어. 싫다면 앙그렌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소렌슨은 마법통신기가 다시 먹통이 된 건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나랑 내 동료 마법사 두 명은 변절한 마법사, 로게빈의 빌게포츠의 거점인 스티가 성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았어. 그리고 거기서 마법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생물의 잔해를 찾아냈지. 우리는 그 생물을 재생시키려 했고, 결국 성공했어."


"흡혈귀를 살려냈다는 건가? 대체 왜지?"


"물어볼 게 있었거든. 아마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을 테니까. 스티가 성에선 아직도 이해가 안 갈 만큼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잖아."


"그럼 그 흡혈귀가 꽤 괜찮은 대화 상대가 돼 줬겠군."


"그렇진 않았어. 놈은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을 에미엘 레지스라고 소개하고 다녔어. 놈이 고대의 존재이자 지적인 생물이라는 증거도 많지. 하지만 다시 깨어났을 때 놈은 맹목적인 굶주림으로 가득했어. 그래서 뭔가 제대로 물어보기도 전에 도망쳐버렸고. 놈을 과소평가했던 거지."


"아니면 놈이 도움을 받았든가. 말했잖아. 흡혈귀는 두 놈이야. 같이 움직이지."


"그래서 거래를 취소할 거야? 아니면 계속 불만만 늘어놓을 거야?"


소렌슨은 사브리나의 말을 무시했다. 길을 돌자 작고 허름한 오두막이 나타났다. 소렌슨은 고삐를 당겨 말을 오두막 쪽으로 움직였다.


"가 봐야겠군. 일은 내가 처리하지."


"잘 생각했어."


*


"테메리아 출신 약탈자들이었습니다. 평범한 도적들이었죠. 저희 집을 약탈하려 했지만, 회색 머리 남자가 놈들을 막았어요.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도적들을 진정시켰죠. 식료품 저장소를 모조리 털어가지 못하게 막았고요. 그리고 말을 가져간 대가도 지불했죠."


"황금..." 에인은 고개를 숙였다. 생각도 안 하고 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위쳐는 자신의 목에 있는 상처를 문지르며 말했다. "보여 주시죠."


농부는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새로 나타난 사내의 말에는 일개 부대를 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무기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뱀이나 도마뱀 같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사내를 상대로 허튼짓을 해서 좋을 게 없었다. 농부는 내키지 않았지만, 나막신을 벗고 칼로 신발 밑창을 뜯어내 동전을 꺼냈다.


변색된 황금에 날개 달린 사자와 인간의 머리가 새겨져 있었고, 반대쪽에는 전차가 있었다. 소렌슨은 이런 동전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두르 루갈 이딘 언덕에서였다. 놈들의 흔적이 사라져 간다고 걱정하던 참이었기에, 늑대 교단 위쳐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이 동전은 300년 이상 지난 것이오. 요즘엔 무덤에서나 찾을 수 있지. 놈들이 당신을 노리지 않은 게 행운인 줄 아시오."


"아, 무덤 도굴꾼이었나요? 무덤을 파헤치고 다니는?"


소렌슨은 뱃대끈을 조절하고 다리를 등자에 넣은 뒤, 안장으로 뛰어올랐다. "더 끔찍한 놈들이지. 이놈들은 과거의 그 시절을 기억하는 놈들이니."


농부는 떠나가는 금화를 바라봤다. 그리곤 크게 침을 삼키고 한숨을 쉰 뒤, 오두막에 틀어박혀 있는 딸을 진정시키기 위해 발을 옮겼다. 농부는 딸을 혼낼 생각이 없었다.


챕터 7


네리스는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가리며 레지스를 따라갔다.


"딜링겐에 피난처가 있다고 했지? 그럼 피난처로 향하는 중이었나?"


"그런 셈이지."


"왜지?"


"숨으려고. 위쳐가 우릴 따라오고 있어. 괴물 사냥꾼 말이야."


일행은 펜 카른을 떠나고 이틀이 지나서야 야루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침내 맑게 갠 하늘이 일행을 반겼고, 눈 덮인 평야가 석양빛에 물들어 반짝였다.


"위쳐? 내가 보기엔, 당신 같은 존재 앞에선 위쳐가 다섯은 몰려와도 안 될 거 같은데."


디틀라프는 코트의 단추를 풀고 자신의 둔부를 보여 줬다.


"봐."


네리스는 디틀라프의 옆구리가 흉물스럽게 움푹 파인 것을 보고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3주 전에 월푸르트에서 놈에게 공격당했어. 원래 이런 상처는 하룻밤이면 치유되는데..."


"아무래도 흡혈귀 전문 사냥꾼인 것 같아." 레지스가 말했다. "그러니 각별히 조심해야 해."


"그럼 그냥 펜 카른에 있는 게 낫지 않나? 워낙 평판이 안 좋은 곳이라 숨어 있긴 좋을 텐데..."


"미신이나 돌무더기로는 부족해." 디틀라프가 말했다. "하지만 안전한 장소를 몇 군데 마련해 뒀지."


네리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떨까? 딜링겐 근처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오자 네리스는 말을 멈췄다. 레지스는 시들어 버린 나무 사이에 있는 야영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텐트에 몇 개 설치돼 있었고, 텐트에 난 구멍 사이로 모닥불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레지스가 말했다.


*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놈들이 저희의 터전을 빼앗았어요. 그리고 아직도 저희 마을에 있답니다. 망할 병사 놈들, 지옥에나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일행은 굳은 얼굴로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인 뒤에 펼쳐진 추방자들의 야영지를 바라봤다.


"저희 마을에 자기들 깃발을 매달아 뒀어요. 무슨 군사 기지라도 된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여긴 우리 마을이고, 저쪽 물가에 가면 저희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야루가 강을 건너기 위해 사용하던 배가 있으니 그걸 타고 건너가라고요. 하지만 놈들은 들은 척도 안 했죠. 전 아이를 품에 안고 자비를 구했어요. 이제 겨울이라서 춥고 배고파질 거라고요. 제발 인간적으로 오두막 하나만이라도 달라고 애원했죠."


"하지만 묵살당했군." 디틀라프가 말했다.


여인 뒤에서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굶주린 얼굴이었지만, 눈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여인은 아이의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는 모자를 씌워줬다.


"놈들은 닐프가드 침략군이에요." 여인이 말했다. "망할 침략군 놈들. 흑종과의 싸움이 끝나서 나라가 해방됐을지는 몰라도... 저희는 여전히 마을을 되찾지 못하고 있어요. 저희한테는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레지스는 이를 악물었다.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동틀 무렵에 마을로 돌아가시죠."


"하지만 군부대가 있는걸요... 노력해 봤지만..."


"압니다. 이번엔 제가 말해 보죠."


*


일행은 땅거미가 질 무렵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눈 때문에 지붕이 무너진 오두막 다섯 채와 황량한 부두가 있었고, 어선 몇 척의 돛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가장 큰 오두막에서는 즐겁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레지스는 어깨에 있는 가방을 풀어 디틀라프에게 건넸다.


"여기서 기다려." 레지스가 말했다.


레지스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 안에는 파이프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레지스가 들어오자 탁자에 모여 있던 병사들은 조용해졌다.


"뉘시오?" 관자놀이에 상처가 있는 수염 난 사내가 물었다.


"저는 에미엘 레지스라고 합니다. 딜링겐으로 여행 중이지요."


병사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통통한 손 위에 거칠거칠한 턱을 괴었다.


"혼자서 여행을 하신다고? 그것참 용감하시군."


"멍청한 거겠지!" 다른 병사가 끼어들었다.


"그래, 진짜 멍청하지." 턱수염 있는 남자가 말했다. "에미엘 레지스, 댁은 길을 잘못 들었어. 하지만 다행히 언덕 너머로 이어진 길이 있으니, 그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될 거요."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여긴 왜 온 거지?"


"마을을 빼앗긴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중에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레지스는 문을 닫고 탁자로 다가갔다. 병사들은 손을 더듬거리며 칼자루를 찾았다.


"그건 명령이었어." 턱수염 있는 남자가 말했다.


레지스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탁자 위의 병이 흔들렸다.


"명령이 바뀐 것 같군요." 레지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당신들 마을이 아닙니다. 당장 비도르트로 떠나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만났고 당신이 여기 있었다는 건 다 잊으시고요."


턱수염 있는 남자의 얼굴이 풀어지더니 곧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예, 알겠습니다."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 병사까지 오두막을 나가자, 레지스는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근처의 벤치로 움직이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레지스는 쓰러지며 의자에 머리를 부딪쳤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레지스는 여정을 시작하던 때를 떠올렸다. 황무지에 있던 병원.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의 나지막한 신음과 죽음의 냄새를.


이자들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야.


내 손으로 죽이진 않을 거야.


레지스 옆에 서 있는 디틀라프의 손에선 붉은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넌 피가 필요해, 레지스.


챕터 8


"돈은 어디다 숨긴 거냐고, 이 망할 자식아! 말하라니까?!"


"으윽!"


까마귀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는 남자들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익사자처럼 창백했던 지휘관의 얼굴은 오샨이 목을 조르자 금세 붉은빛으로 변했다.


"으으윽!"


그때 어스킨이 공터로 들어왔다. 어스킨은 욕을 하며 들고 있던 땔나무 더미를 내려놨다. 그리고 단숨에 썰매까지 다가가서 오샨의 코트를 낚아챈 다음 오샨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털옷을 입은 노인은 어느새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서 숨을 쉬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미친, 죽이기라도 할 셈이야?!" 어스킨이 오샨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나갔어? 어?! 놈이 깨어나면 날 부르라고 했잖아!"


오샨은 팔꿈치를 사용해 어스킨의 발이 닿지 않는 곳으로 허둥지둥 기어갔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 그냥 겁을 좀 주려고." 오샨은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어스킨은 오샨을 쏘아보았다. 오샨이 지휘관을 협박해 어떻게든 돈을 숨긴 장소를 알아냈다면, 오샨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추위 속에 어스킨을 버려둔 채 지휘관의 멱살을 잡고 숲속으로 달려갔을 것이었다. 그들이 네리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한 번만 더 이랬다간 네 불알을 나무에 걸어 버릴 거야."


"너희 불알을 걸어야지." 지휘관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탈영병 주제에... 배신자들!"


어스킨과 어샨은 동시에 낄낄대기 시작했다.


"지휘관 나리, 우릴 이딴 식으로 대하시겠다? 우린 당신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 줬어! 병든 당신을 열과 성을 다해 간호해 줬다고! 그럼 짧게 감사 인사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닐까?"


"사형 집행자가 도끼로 감사를 표할 테니 걱정 마."


어스킨은 거칠고 뻣뻣한 손을 모아 입김을 불고는 썰매의 난간에 기대어 섰다. 오샨도 자리에서 일어나 썰매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지휘관은 서리 낀 눈으로 둘을 노려봤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이제는 거짓말을 해도 의미가 없었다. 그랬다간 어떻게 되는지 오샨이 이미 보여 줬으니 말이다.


"돈은 다 어디에 두셨을까, 형씨?"


"돈은 병사단 것이다. 모두에게 공정하게 나눠줄 거야."


"웃기고 있네. 내가 말하는 건 딜링겐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말하는 거야. 뭐, 도둑의 명예라도 지키시겠다는 건가?"


"흑종으로부터 되찾은 도시에서 정복자의 규칙에 따라 회수한 것이다. 어스킨, 전쟁은 처음인가? 아무리 봐도 처음인 것 같은데?"


"처음은 아니야. 근데 회수한 돈을 손에 넣는다면 이게 마지막일 거 같긴 하네. 트럼펫 소리에 맞춰서 행군하는 건 취향에 안 맞아서 말이야."


오샨은 입술을 오므리며 칼을 꺼냈다. 그러더니 칼날에 침을 뱉고는 소매로 닦아냈다.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칼침 좀 놔주면 알아서 술술 불게 될 테니까."


어스킨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스킨은 아직 지휘관을 향해 존경심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강철과도 같은 의지를 기반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스킨은 늙은 지휘관을 미친개처럼 물어뜯지 않고, 지휘관이 상황의 심각성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잠깐 시간을 주었다.


물론, 오샨은 이러한 점까지 고려하진 않았다. 지난가을 케드웬 기병대가 오샨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농장을 약탈하고 파괴한 후, 오샨은 폴테스트 왕의 군부대에 자원했다. 오샨에게 '병사'란 '면책권을 지닌 도둑'과 다를 바가 없었고, 그래서 군에 자원한 것이었다.


차가운 칼날이 털옷 속에서 미끄러지며 지휘관의 피부를 눌렀다. 지휘관의 상처투성이 얼굴을 덮고 있던 분노와 억울함은 이내 무력감으로 변했다. 결국 지휘관은 운명에 굴복하고 입을 열었다.


"딜링겐에서 야루가 강을 따라 동쪽으로 하루 정도 가면 제재소가 있다. 거기서 닐프가드군과 충돌했지. 놈들은 바지선을 타고 강 건너편으로 후퇴하려 했어..."


어스킨과 오샨은 상처 입은 남자를 향해 굶주린 독수리처럼 몸을 기울였다.


챕터 9


디틀라프는 레지스를 탁자 옆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방을 둘러본 뒤, 지하에 있는 해치로 향했다.


"무모한 짓이었어." 디틀라프가 말했다.


"알아."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하지 마. 뭐가 필요한지는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그렇지."


난롯불이 사그라들자 어둠이 버려진 오두막 내부를 뒤덮었다. 네리스는 탁자 옆 의자에 앉아 맨드레이크 혼합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레지스는 쓰러지면서 부딪친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래."


"그럼 조건을 하나 걸지.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최대한 자세하게 요약해서 얘기해 줘."


"진실이란 건 지루한 거야, 레지스." 레지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딜링겐 근처 어딘가에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으로 가득한 상자가 있어. 지휘관, 그러니까 아르나울트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하려고 어딘가에 숨겨 뒀지. 하지만 마지막 작전 중에 아르나울트는 부상을 당했어. 그래서 우리가 야전 병원에 있던 아르나울트를 데려와서 이동 중이었던 거야. 거기 있다간 비참하게 차가운 송장이 됐을 테니까."


"그보단 보물 상자의 위치가 궁금했겠지."


네리스는 답하지 않았다. 레지스는 손을 쫙 폈다.


"미안하지만 별로 와닿지 않는데."


"놈들을 따라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잖아. 어스킨과 오샨... 놈들과 만나 봤으니까. 놈들이 어떤 인간인지 봤잖아."


"그러는 넌 어떤 사람이지?"


"난 금화를 챙기고 싶을 뿐이야. 지휘관을 죽이고 싶진 않아."


"참 고결하군."


"고결하다는 건 당신한테나 어울리는 말이지, 레지스. 부정하지 마. 당신이 아르나울트를 매일매일 간호하는 모습을 봤어. 그리고 당신은 나도 도와줬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말이야. 진실을 알고 싶어? 그래, 말해 줄게.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르나울트는 죽고 말 거야. 그리고 당신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 싫어서 나와 함께 가겠지."


디틀라프는 지하로 향하는 비밀 문을 들어 올렸다.


"맞는 말이군, 레지스." 디틀라프가 말했다. "그럼 움직여 볼까."


*


지하 저장고는 습했고, 오두막 안보다 더욱 어두웠다.


레지스는 바닥에 숯을 놓고 상징을 완성했다. 그리고 원형진 안에 펜 카른의 오두막에서 가져온 점토 그릇을 놓았다.


"왜 그자를 구했지, 디틀라프?"


"누굴 말하는 거지?"


"이나에서 테메리아 병사를 구했잖나. 그냥 둘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 남자를 구해야 할 것만 같았어... 너라면 그랬을 테니까."


원형진이 빛나더니, 고대의 마법으로 인해 대기가 요동쳤다. 디틀라프는 그릇 앞에 서서 순식간에 자신의 손목을 베었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한텐 항상 쉬운 일이었어." 디틀라프가 말했다. "난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 그래서 인간이나 인간 문명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어. 인간은 전염병처럼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어. 그것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어설프게 말이야."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나?"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바뀌긴 했나 보군."


디틀라프는 움찔하며 감각이 없어진 손가락을 움직였다.


"넌 인간한테서 무언가를 느낀 거 같더군." 디틀라프가 말했다. "그래서 계속 인간을 도우려 하는 거지. 정말이지..."


"순진하다고?"


"아니, 흥미로워."


디틀라프가 상처를 봉한 뒤 원형진에서 빠져나오자, 레지스가 그 자리로 이동했다. 레지스는 양손으로 그릇을 움켜쥔 채 주문을 읊조리고는 그 안에 들어 있는 피를 마셨다.


신선한 피가 몸으로 들어오자 레지스는 엄청난 행복감에 취해 몸을 떨었고, 그동안 잠들어 있었던 흡혈귀의 감각이 멀리까지 확대되었다. 이제 레지스는 언덕에 눈을 뿌리는 회오리바람 소리부터 야루가 강의 탁한 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 머나먼 길을 달리는 말의 푸르릉 소리와 말발굽 소리까지 온갖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말이 앓는 소리를 내자 소렌슨은 고삐를 당겼다. 그는 어서 오두막 근처에서 벗어나 흡혈귀들을 추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이 틀 무렵, 소렌슨은 털로우 언덕의 공터에 도착했다. 바위 위로 소나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소렌슨은 쓰러진 나무의 밑동에 앉아 망토를 둘렀다.


"사브리나."


"지금이 몇 시인지 알기나 해? 소서리스는 잠도 안 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흡혈귀들을 찾았어."


한숨이 이어졌다.


"계약을 완료했다는 거야?"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놈들의 대화를 들었고, 놈들이 누굴 쫓고 있는지도 알아."


"소렌슨... 단순히 놈들을 추적할 거라면 추적자를 고용했겠지. 근데 당신은 위쳐잖아?"


"그래, 멍청이가 아니라 위쳐지. 그 레지스라는 회색 놈... 놈에겐 죽음을 선사하는 게 자비로운 처사라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는 것 같아. 야루가 강 근처에서 어떤 병사들한테 최면을 걸었더군."


"그래서 다시 흥정하자고?"


"도움이 필요해."


가벼운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준비된 여자라 다행인 줄 알아."


빛이 번쩍이더니 근처에 포탈이 열렸고, 소용돌이치는 혼돈 속에서 강력한 힘이 뿜어져 나와 무기의 형상을 취했다. 형상은 점점 선명해지더니 뜨거운 열기를 간직한 채 고체화되었고, 장식이 새겨진 단검이 눈밭 위로 떨어졌다.


소렌슨은 단검을 집어 들고 손가락을 펼쳐 단검에 새겨진 룬을 어루만졌다.


"이걸로 뭘 하라는 거지? 고기라도 자를까?"


"마법의 힘이 깃든 단검이야. 흡혈귀의 살점에 닿으면 새겨 둔 마법이 발동하지. 기존의 마법을 그대로 구현하진 못했지만, 단검에 새겨 넣은 정도로도 충분할 거야."


"정말 효과가 있을까?"


"글쎄. 근데 이 마법을 만든 빌게포츠가 이렇게 사악한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니까. 이 마법을 다시 구현하는 것만 해도 진짜 어려운 일이거든. 칼날에 새기는 과정만 해도 일주일은 걸려. 그니까 신중히 사용해. 마법은 일회성이니까."


"두 놈이라는 말을 잊은 건가?"


"알아, 알아. 하지만 소렌슨, 당신은..."


소렌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무 밑동에서 일어난 뒤, 벨트 아래로 단검을 밀어 넣었다.


"그래, 난 위쳐니까."


"그래. 당신이라면 뭔가 방법을 찾아내겠지." 사브리나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렇지?"


소렌슨은 말에 올라탄 뒤, 공터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하는 썰매 자국을 바라봤다.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챕터 10


오샨이 씩씩대며 제재소 밖으로 뛰쳐나오자, 경첩 하나에 매달려 애처롭게 흔들리던 문이 벽에 맞고 튕겨 나왔다.


"없어, 없다고! 땡전 한 푼 없잖아!"


"지휘관이 말한 흔들리는 벽돌은 찾았어?"


"지하 저장고를 보긴 했어? 절반이 넘는 벽돌이 전부 흔들린다고! 벽이란 벽은 죄다 무너뜨려 봤는데 비밀 장소 같은 건 없었어. 오히려 벽이 무너져서 빌어먹을 흙더미에 묻힐 뻔했다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아니야."


어스킨은 공터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야생 동물들이 얼어붙은 시체를 죄다 파헤쳐서 뜯어먹긴 했지만 공동묘지가 있었다. 그리고 흑종들의 닐프가드 망토에는 전갈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니, 여기야. 데어란 7여단의 창기병들의 시체가 무더기로 있잖아. 지휘관이 말한 그대로라고."


"그럼 뭔가를 섞어서 말했나 보지. 일단 깨워 봐."


썰매 쪽에서 난처하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지휘관은 이미 깨어나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즐겁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지?" 오샨이 으르렁거리며 늙은 지휘관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어스킨이 오샨의 손목을 잡았다.


"진정해. 뭔가 말하려고 하잖아."


어스킨은 지휘관의 입 근처에 귀를 가져다 대고 지휘관의 거친 속삭임을 들으려 애썼다. "너희는 다 죽은 목숨이야, 이 멍청한 놈들아."


지휘관은 씩 웃으며 털옷 밖으로 손을 꺼낸 후 떨리는 손가락으로 딜링겐 쪽을 가리켰다. 낮게 뜬 태양이 잎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물푸레나무 숲 뒤로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두 탈영병은 늙은 지휘관이 가리킨 방향을 유심히 살폈다.


갑자기 어스킨이 쪼그리고 앉아 가장 가까이 있는 시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시체의 갑옷에는 십자 형태로 발톱 자국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잘게 조각난 얼어붙은 살점이 보였다. 뼈는 늑대의 턱보다 강력한 턱에 의해 쪼개지고 부러져 있었다.


이제 시체처럼 창백해진 테메리아인은 벌떡 일어나 자신의 동료를 바라봤다.


'시체 포식자.'


어둠이 깔린 나무들 사이로 무시무시한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고, 지휘관의 악의로 가득한 웃음소리가 탈영병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


위쳐는 썰매의 흔적을 따라갔다. 그가 숲을 지나 공터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공터에는 버려진 나무꾼의 오두막이 있었고, 그 옆에는 베어낸 나무의 밑동이 보였다. 그때 굶주린 울음소리가 미친 듯이 으르렁대며 잔잔한 강물 소리를 뚫고 나왔다. 말은 고개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더 이상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위쳐는 말에서 내려 두 발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소렌슨은 늘어선 나무 사이를 지나쳐 공터 입구에 도착했다. 보름달 빛이 야루가 강의 은빛 물 위와 은빛 눈길 위, 위쳐의 은검 위에서 춤을 추었다. 구울 떼가 제재소 안에 방어벽을 펼친 사람들을 덮치기 위해 제재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썰매 한 대가 물레방아 옆에 버려져 있었고, 끔찍한 괴물 중 하나가 그 위에 있는 불쌍한 자를 잡아먹고 있었다. 살점을 뜯고 뼈를 조각내는 끔찍한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석궁에서 발사된 볼트가 썰매 위의 괴물을 밀어낸 뒤 나무에 박아 고정시켰다.


소렌슨은 벨트에 걸린 작은 폭탄을 손에 들고 이그니 표식을 사용해 심지에 불을 붙인 후 괴물 사냥을 시작했다.


*


솔직히 위쳐는 시체 포식자만큼이나 무서운 존재였다.


그는 파충류의 눈을 지니고 있었고, 목과 관자놀이에는 부어오른 검은색 혈관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옷은 괴물의 피로 흠뻑 젖어 불쾌한 악취를 풍겼다.


"술 좀 있소?"


그 말에 탈영병들은 왠지 모르게 친밀감을 느꼈다. 오샨은 위쳐에게 수통을 건넸다.


"당신들 친구가 이리로 오고 있소. 곧 만날 수 있겠지."


탈영병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어스킨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있는 칼자루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섣불리 칼을 뽑지는 않았다.


"대체 뭘 보고 우리한테 동료가 있다고 하는 거지? 우리 흔적을 따라온 건가?"


"당신들이 아니라 당신들 길동무를 따라온 거요."


"그자들에게 볼일이라도 있나?"


"그런 셈이지. 놈들을 잡으라고 돈을 받았으니. 이미 알겠지만 난 위쳐요."


"그럼 그자들은 익사체라도 된다는 말인가?"


"흡혈귀지."


어스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상당히 평범해 보였는데." 어스킨이 간신히 대답했다.


"나도 놀랐소." 위쳐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갔다. "평범해 보일지 몰라도, 아주 위험한 놈들이지."


오샨은 실망감에 사로잡혀, 그것 때문에 실패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녹슨 도구 더미를 걷어찼다. 도구 더미는 무너지며 슬프게 덜거덕 소리를 내었다.


"저 늙은이가 우릴 속였어. 보물을 찾으러 왔는데, 오히려 죽을 뻔했지. 이렇게나 멀리 왔는데, 오렌 한 푼 못 찾았다고."


위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피 묻은 손가락 사이로 동전을 굴렸다. 앞면엔 스핑크스, 뒷면엔 경주용 마차가 새겨진 고대 금화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탈영병들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동전을 바라봤다.


"당신들이 여기서 뭘 찾으려 했는지는 몰라도, 더 나은 제안을 하고 싶군. 난 동료가 필요하오."


"그럼 보수는... 금화로?" 오샨이 침을 삼켰다.


"보수를 주는 건 내가 아니오." 위쳐는 심술궂게 미소 지었다. "그건 흡혈귀들한테 받을 거요. 놈들에겐 이런 금화가 많이 있소. 그러니 날 도와... 함정을 준비해 주시오."


챕터 11


전장은 고요했다. 제재소 지붕에 매달린 고드름과 쓰러진 병사의 녹슨 갑옷 위로 보름달이 반짝였다.


일행은 물레방아 근처에서 썰매를 발견했다.


레지스는 피범벅이 된 말의 사체 위로 올라서서 그 아래에 지휘관이 덮고 있던 털옷을 갈랐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검은 구멍만이 있었다. 뺨은 갈려 나가고, 얼어붙은 입은 일그러진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네리스는 몸을 구부리고 속을 게워냈다.


일행의 뒤편, 그림자가 드리운 덤불 속 어딘가에서 볼트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볼트가 날아왔다. 볼트는 레지스의 팔을 꿰뚫고 레지스를 썰매에 고정시켰다. 상처에서는 지글지글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고, 이내 사방에 고기 굽는 냄새가 퍼졌다.


네리스가 소리쳤다. "저기야!" 네리스는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고 숲을 향해 달려갔다.


디틀라프는 이미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소리와 무기 위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룬을 기억하고 있었다.


디틀라프는 즉시 변신해서 가죽 날개를 펼치고 숲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곧 네리스를 추월하고 덤불 속에 착륙한 후, 위쳐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


괴물이 미끼를 물었다.


소렌슨은 놈이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다음, 숲속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용병 대장도 칼을 뽑아 들고 흡혈귀를 따라 달려갔다.


여자까지 죽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위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위쳐는 포션을 마시고 깊게 숨을 내쉰 뒤, 판자 더미 속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두 걸음 만에 썰매에 박혀 있는 흡혈귀에게 다다랐다. 단번에 목을 베어주지.


위쳐가 검을 휘두르자 위쳐의 은검이 쉬익 소리를 냈다.


심장 박동이 너무나 느렸다.


마지막 순간에 흡혈귀는 빠져나오며 발톱으로 공격을 튕겨냈다. 하지만 위쳐는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위쳐는 검을 내려찍는 척하며 흡혈귀의 동작을 꼬이게 만들더니, 앞으로 돌진해서 야수의 몸통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괴물은 순간 뒤로 빠졌다가 위쳐를 덮쳤다. 반짝이는 손톱이 간발의 차이로 소렌슨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위쳐는 무릎을 꿇으며 낮게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적에게 명중했고, 야수의 다리 아랫부분을 벨 수 있었다. 하지만 위쳐는 멈추지 않고 바로 흡혈귀의 목을 노렸다. 흡혈귀는 손으로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검날에 손가락이 잘려 나갔고, 야수의 목을 노리던 검은 속력을 잃고 빗나갔다.


괴물은 위쳐를 향해 손을 뻗었고, 손톱으로 위쳐의 목을 움켜쥐었다. 소렌슨은 컥컥거리며 벨트에 매달아 둔 폭탄에 손을 뻗어 자신의 발치에 떨어뜨렸다. 폭발 소리와 함께 끔찍한 신음이 울려 퍼졌다. 두꺼운 안개가 사방을 감싸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위쳐는 검을 휘둘러 야수의 가슴팍을 벤 후, 아드 표식을 사용해 흡혈귀를 뒤로 밀쳐냈다. 흡혈귀는 밀려나며 썰매와 충돌했고, 지휘관의 시체와 뒤엉켜 어둠 속에 처박혔다.


소렌슨은 목을 문지르며 빠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위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괴물은 엄청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만티코어 은에 당한 상처는 당장이라도 불타올라 흡혈귀를 더욱 약하게 만들 것처럼 보였다.


위쳐는 양손으로 검을 움켜잡고 숨을 골랐다.


"이제 끝낼 시간이다." 위쳐가 말했다.


*


디틀라프의 눈에 인간의 형상이 붉게 빛났다. 거기에는 석궁병 한 명과... 다른 누군가가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놈들의 피에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이 두 어리석은 자들은 얼마 전까지 자신과 여행을 하던 자들이었다. 위쳐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귀찮군.


석궁에서 볼트가 발사됐지만 빗나갔고, 디틀라프의 가벼운 손톱 공격 한 번에 허공으로 날아갔다. 디틀라프는 몸을 낮추고 빠르게 다가가서, 날개를 펼쳐 커다란 가지 위에 있던 석궁병을 낚아챈 후 떨어뜨렸다. 석궁병은 가지 아래의 눈 더미로 떨어지며 무기를 땅에 떨어뜨렸다.


디틀라프는 공중에서 작게 호를 그린 다음, 땅에 착륙해 인간의 형상으로 변신했다. 다른 사내는 자신이 들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나무 밑동 뒤편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오며, 땅에 내려온 흡혈귀의 목을 향해 단검을 찔렀다. 하지만 디틀라프는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로 단검이 목에 닿기도 전에 매복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디틀라프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푸르게 빛나는 룬이 새겨진 검날을 바라봤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디틀라프는 자신을 기습한 자에게 시선을 돌려, 붙잡은 손목을 으스러뜨렸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놓치고 말았다. 디틀라프는 사내를 뒤로 밀쳐 눈 속에 파묻어버렸다.


흡혈귀는 희망을 잃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두 남자를 바라봤다. 그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처벌을 기다리는 범죄자처럼 흡혈귀를 바라봤다. 이들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댔고, 긴장해서 깊게 숨을 들이쉰 나머지 폐는 터질 듯했다. 숨을 내쉬면 차가운 공기 속에 입김이 퍼져나갔다. 공포, 두려움, 몸부림, 속임수... 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이유가 뭘까?


"왜지?" 디틀라프가 물었다. 디틀라프가 숨은 차가웠기에 입김은 보이지 않았다.


두 남자는 계속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떨고 있었다. 그때 제재소 방향에서 네리스가 나타났다.


"놈들은 괴물이야." 오샨이 부러진 팔을 움켜잡고 소리쳤다. "놈들과 같은 편이 된 거야? 괴물과 같은 편이 된 거냐고?!"


네리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오샨이 땅에 떨어진 단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걸 보고 단검을 집어 디틀라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놈들이 지휘관을 죽였어. 죽여 버려. 아니면 내가 죽일 테니까."


흡혈귀는 네리스에게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왜지?" 흡혈귀가 다시 말했다. "지휘관을 따라 여기 온 게 아닌가? 그냥 돈만 챙겨서 가면 되는 문제 아니었나? 왜 우리에게 무기를 들이대는 거지?"


"돈 같은 소리 하네!" 오샨이 소리쳤다. "저 영감탱이는 시체 포식자들이 나뒹구는 전장으로 우릴 유인했어!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는 말하지도 않았다고! 그리고 그렇게 뒈져버렸지!"


"하지만 저놈들..." 어스킨이 끼어들어 디틀라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들한텐 진짜 엄청난 보물이 있어! 고대 무덤에서 나온 금화가 있다고! 우리가 타고 온 말도 그 금화로 구한 거야. 위쳐가... 위쳐가 다 말해줬어."


금화가 반짝였다. 네리스는 테메리아 탈영병들이 자신을 향해 던진 동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딱 봐도 비쌀 수밖에 없는 동전이었다.


"저놈들한텐 그런 동전이 많아. 평생을 써도 남을 정도로 있다고. 우린 그것도 모르고 지휘관 놈이 숨겨둔 돈을 찾으려 한 거고..."


디틀라프는 실망했다. 그는 인간에게 보기보다 뛰어난 무언가 있고, 인간은 탐욕에 사로잡혀 욕망에 목숨을 거는 멍청한 종자가 아니라는 레지스의 말에 거의 설득당했었다. 인간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비열한 존재가 아니고 타락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레지스는 틀렸다. 인간은 구제 불능이었다. 그들이 지휘관의 숨겨둔 돈을 찾을 수 없었듯이, 디틀라프도 인간의 본성에서 어떠한 가치도 찾을 수 없었다. 상자를 열고 들여다봤지만, 항상 그랬듯이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디틀라프는 한 손으로 몸을 떨고 있는 오샨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젖힌 후 송곳니를 내밀고 코에 느껴지는 피 냄새를 맡았다. 행복감이 디틀라프의 몸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갑자기 고통이 느껴졌다.


네리스가 엄청난 속도로 디틀라프의 팔에 있는 힘껏 단검을 쑤셔 넣은 것이었다. 흡혈귀는 오샨을 떨어뜨리고 뒤로 펄쩍 뛴 후, 쉬익 소리를 내며 이빨을 내밀었다. 마법이 새겨진 검이 박혀 있던 곳에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불꽃은 천천히 흡혈귀의 팔을 감싸더니 목을 향해 번졌다. 흡혈귀는 자신의 팔을 베어 마법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무기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때, 어스킨이 눈 속에서 석궁을 집어 들어, 흡혈귀를 겨냥하고 볼트를 발사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은제 볼트가 마법 불꽃에 당하지 않은 반대편 팔을 나무 밑동에 못 박았다.


한쪽 팔은 나무에 고정돼 있고 한쪽 팔은 마법 불꽃에 잡아 먹히고 있는 상황에서 디틀라프는 피의 힘을 끌어내 변신하려 했다. 하지만 위쳐의 은 때문에 변신은 불가능했다.


디틀라프는 오싹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고, 어둠 속 먼 곳에서 이에 답하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몫은 두 배로 줘." 네리스가 오샨을 일으키며 말했다.


챕터 12


레지스는 일어나려 했지만, 상처 입은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았다. 가슴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잘려 나간 손가락 때문에 손이 계속 욱신거렸다.


레지스는 옆에 놓인 지휘관의 시체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최소한 지휘관은 더 이상 고통스럽진 않을 테니.


위쳐가 레지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위쳐의 은색 검날 위에 달빛이 춤추고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미안하게 됐군.


레지스는 시체를 향해 기어가 시체의 몸통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금속 같은 뒷맛이 레지스의 혀를 감쌌다. 레지스의 몸속에 행복감이 밀려 들어왔다. 상처가 서서히 사라지고, 고통도 점점 무뎌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썰매 잔해 뒤에서 위쳐가 나타나 욕을 내뱉었다. 레지스는 일어나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레지스의 눈은 붉게 변해 있었다.


그는 야생 동물처럼 울부짖었다. 레지스의 얼굴은 무시무시하게 변했고, 치유된 손가락에선 기다란 손톱이 솟아났다.


나머지는 아예 알아볼 수도 없었다. 레지스는 자신의 몸에 침투해서 원시 짐승의 살점을 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신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바라봤다.


그리고 이 짐승은 피를 원하고 있었다.


위쳐는 손가락을 굽혀 표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흡혈귀가 손쉽게 표식을 피했고, 그 대신 에너지 파동이 눈더미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위쳐는 다른 폭탄에 손을 뻗었지만 너무나도 느렸다. 흡혈귀는 분노에 찬 일격을 날렸고, 흡혈귀의 손톱이 소렌슨의 몸을 꿰뚫었다. 위쳐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붉게 물든 서리 위로 은검이 떨어졌다.


야수는 송곳니를 뻗었다.


동맥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뛰고, 피가 솟구쳤다. 본능에 굴복하고 흡혈귀의 본분을 행할 때였다.


이런 건 원하지 않아.


레지스의 몸이 굳었다. 무시무시한 얼굴이 부드럽게 변하고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손톱도 움츠러들었다. 레지스는 위쳐를 놓아줬고, 위쳐는 눈 위로 쓰러졌다.


레지스는 새벽이 오기 전의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러자 고동치는 피의 리듬이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레지스는 몸을 굽혀 사냥꾼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난 괴물이 아니야." 레지스가 말했다.


레지스는 위쳐를 홀로 내버려 둔 채 몸을 돌려 숲속으로 걸어갔다.


*


푸른 불꽃이 디틀라프의 손과 팔뚝을 숯덩이로 만들고, 이제 어깨와 목을 휘감고 있었다.


"위쳐가 그러는데, 푸른 불꽃이 흡혈귀를 뼈만 남기고 불태워 버릴 거라고 하더군."


"늙은 지휘관 놈처럼 우릴 속일 생각은 하지 마! 이 괴물 자식아, 금화는 어디 있지?" 오샨이 느리게 말했다.


흡혈귀는 아직 살아있는 손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지만 볼트가 팔을 으스러뜨려서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디틀라프는 망토를 뒤로 젖히고 손을 뻗어 벨트에 걸린 주머니를 떼어낸 뒤 땅에 던졌다.


부상당한 오샨이 주머니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 뒤에서 볼트가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건드리지 마라, 새끼야." 어스킨이 으르렁거렸다. "우린 보상을 찾아온 건데, 넌 병사가 아니라 그냥 떠돌이잖아."


"나도 도왔어!"


"돕긴 개뿔. 놈을 찌른 건 네리스야."


"그러니 내가 내 몫을 더 달라고 한 거고." 네리스가 말했다.


"꿈 깨시지." 어스킨이 네리스를 노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넌 흡혈귀 놈들과 한패였잖아. 오샨, 움직이지 마. 볼트에 박히기 싫으면."


"우... 우린 둘이야... 혼자서... 둘을 상대할 순..."


"어스킨, 저놈을 처리해. 그리고 우리끼리 빠져나가자. 위쳐가 일을 마치고 자기 몫을 달라고 하기 전에."


어스킨이 코웃음 쳤다. "정말 뱀 같은 여자로군."


"셋보단 둘이 나누는 게 낫잖아."


"그러다 위쳐가 널 쫓아오면 어쩌려고?"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웃기지 마. 내가 왜 너랑 힘을 합쳐야 하는데?"


두 사람이 싸우는 틈을 노려 오샨이 숲속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어스킨과 네리스에게 금방 따라잡히고 말았다. 네리스는 오샨에게 다리를 걸었고, 오샨은 얼어붙은 땅을 굴러 도랑에 처박혔다. 어스킨과 네리스는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곧 디틀라프의 부름에 응한 수많은 존재가 몰려와, 탈영병들에게 돌을 던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물푸레나무를 조용히 둘러싸고 눈을 번뜩였다. 이들은 뜨거운 침을 흘리며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중 하나가 이빨로 볼트를 뽑아, 나무에 박힌 디틀라프를 풀어줬다. 디틀라프는 풀려난 손의 뻣뻣한 손가락을 쫙 폈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디틀라프는 마법 불꽃에 타버린 팔의 잔해를 뜯어 땅에 던졌다. 단검에 찔린 팔은 눈 속에서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디틀라프는 손을 들어 올렸고, 밤의 생명체들은 기대감에 몸을 떨었다. 지휘관은 이들이 어떤 자들이고 어떤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디틀라프는 지휘관의 의지를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디틀라프는 시체 포식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새벽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디틀라프는 오래된 물푸레나무 곁에 홀로 앉아 있었다. 레지스가 다가와 디틀라프 옆에 무릎을 꿇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얀 눈에 뒤덮인 시체 세 구를 바라봤다. 시체 주변엔 금화가 흩뿌려져 있었다.


"이 둘은... 벌을 받아 마땅했어." 레지스가 말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가혹하군."


"셋 다 벌을 받아 마땅했어. 본인이 자초한 거야. 본성이 파멸을 부른 거지."


"인간 본성의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군."


"전문가? 아니. 그냥 진실을 알게 된 거지."


디틀라프는 레지스의 상처 입은 손을 보며 말했다.


"위쳐는?"


"죽이진 않았어."


"정신 나갔군."


"아니, 난 그냥 변했을 뿐이야."


나무 사이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쓸고 지나갔다. 레지스는 몸을 일으켜 가방을 정리했다.


"난 떠날 거야."


디틀라프는 네리스의 멍한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네리스에게 다가가, 네리스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동전을 챙겼다.


"그래, 가." 디틀라프가 말했다. "네가 그리도 좋아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 거기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길 바라지."


"너는 어떡할 거지?"


디틀라프는 주머니에 금화를 넣었다.


"아직 모르겠어.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알겠군."


*


통, 통, 통. 첨벙.


"사브리나."


소렌슨은 다른 조약돌을 집어 들었다. 납작하고 부드러운 게 완벽한 돌이었다. 야루가 강의 잔잔한 수면이 햇빛에 반짝였다.


통, 통, 통, 통. 첨벙.


"끝났어?" 마법통신기에서 사브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보면 끝났다고 할 수 있지. 의뢰를 포기하겠어."


끔찍한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처럼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게 무슨 말이지? 포기한다고?" 사브리나는 전갈의 독침보다 날카로운 말투로 되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잖아." 소렌슨은 손바닥 안의 조약돌을 굴리다 힘을 주어 강물에 던졌다. 통, 통, 첨벙.


"두려운 거야? 뻔하지 뭐. 겁쟁이 같으니. 핑계조차 한심해. 쓸모없는 놈..."


지겨운 잔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사브리나는 구두장이 같은 유려한 말솜씨와 사악하기 그지없는 상상력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했다. 반대편에서 외쳐대는 소리에 마법통신기가 흔들렸다.


소렌슨은 사브리나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강물을 바라봤다. 잠시 후, 그는 징징대는 소리에 질린 나머지 마법 상자를 집어서 손바닥에 올려놨다.


첨벙.


*


난로 속에서 통나무가 부서지고 방 안에 기분 좋은 온기가 퍼졌다.


에인은 모피 위에 앉아 현을 당겼다. 하지만 바이올린 소리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에인이 핀을 돌려 악기를 조율하고 다시 연주를 시작하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열었다.


에인은 들어온 사람을 단번에 알아봤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카겐에 가셨어요. 혹시... 동료분들은?"


"나 혼자야."


"들어오세요. 몸을 좀 녹이셔야죠."


낯선 이는 탁자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빠져 불꽃을 바라봤다.


"루드카는 잘 있나요?"


"아쉽지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


에인은 악기를 내려놓고 통나무를 이리저리 옮겼다. 낯선 이는 자신의 벨트로 손을 뻗었다.


"그 금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싼 거야."


"하지만 이젠 저희한테 없는걸요."


"알아."


낯선 이는 지갑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에인은 한숨을 쉬었다.


"아뇨... 이건 옳지 않아요. 저번엔 정당하게 루드카의 몸값으로 주신 거잖아요. 제가 멍청해서 금화를 잃은 거지,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낯선 이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것도 정당한 대가로군."


"뭐가요?"


"방금 네가 나한테 교훈을 줬으니까."


남자는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떠났다. 에인은 반짝이는 금화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뒤, 양가죽 코트를 챙겨 어둠 속으로 뛰쳐나갔다.


몇 발자국도 지나지 않아 눈 위의 발자국이 사라졌다. 낯선 이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기나긴 겨울의 시작을 알리기라도 하듯 쓸쓸한 나무 사이로 쌀쌀한 바람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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