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주르 이야기

Chapter 1


"모두 죽었죠. 물론, 저만 빼고." 갈란테아의 말투는 점점 음울해졌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때까지 제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은..."


모닥불의 붉은 화염이 갈란테아의 커다란 푸른 눈 속에서 춤을 추었다. 관중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갈란테아는 어느 새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관중을 훑어보았다. 드워프, 하플링 재단사, 상인, 병사, 그리고 옥센푸르트의 동료들까지. 누구도 갈란테아의 이야기에 끼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에, 갈란테아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희는 시골길을 따라 여행했어요. 해마다 지나치는 거대한 농장과 술집, 사창가, 어디든 돈만 있으면 여흥을 즐길 수 있었답니다. 무척이나 차가운 이른 아침, 안개가 우릴 맞이하자 마치 천상의 숲에 와 있는 듯했죠.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답니다. 마차 앞에선 쉴 새 없이 소리가 들렸어요. 두 배우 조엘과 엘바는 지난 밤부터 술에 취해 떠들썩한 농담을 나누고 있었거든요. 지금도 그때가 선명하게 기억나요. 그들이 나타났으니까요..." 갈란테아가 말을 잠시 멈추자, 긴장감은 한껏 높아졌다. "...날아다니는 공포가요."


하플링 재단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드워프 몇몇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고 낮은 숨을 내뱉으며 불경스러운 말을 중얼거렸다. 허나 다른 이들은 괴물 이야기엔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마시던 벌꿀주를 계속 들이키며 잡담을 이어나갔다. 괴물의 공격은 흔한 일이라 새로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새들의 지저귐은 멈추었고, 산들바람은 고요해졌죠. 안개가 점점 짙어지더니 이내 자욱해지기 시작했어요. 성긴 줄기가 뻗어 나와 나무 사이를 감싸고, 숲속 공터로 뻗어나갔죠. 저희를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말이에요. 저희는 순식간에 짙은 안개에 휩싸였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 담요뿐이었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영혼도 볼 수 없었죠.


처음엔 그걸 재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몇 명 있었어요.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어요. 두려움에 찬 울음소리가 그 웃음마저 침묵시켰고, 이어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죠.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시커먼 그림자가 안갯속에서 날아와 저희 머리 위를 덮치더니 사방에 내려앉기 시작했거든요. 저는 재빨리 마차에서 뛰어내려 아래로 기어들어 가 숨었어요. 그리고 축축한 진흙 속에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친구들이 모두 죽어가는 소리를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죠. 악마의 외침이 들릴 때마다 친구가 하나씩 죽어갔지만, 전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도망친 거야?" 병사는 궁금해서 도저히 못 기다리겠다는 듯 불쑥 끼어들었다.


"조용히 해. 그냥 좀 들으라고." 드워프가 꾸짖었다.


갈란테아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불 속에 나뭇가지를 던져넣었다. "이윽고 친구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어요. 저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괴상한 울음소리만이 들여왔죠. 저는 몸을 숨긴 채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쿵! 소리가 나더니 뭔가가 떨어지면서 마차 가장자리에 앉았어요. 비늘로 뒤덮인 긴 꼬리가 제 앞에서 꿈틀거렸죠. 머리 위, 아주 가까운 곳에서 기괴하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저는 평생 그 어떤 신도 믿은 적이 없지만, 그 절박한 순간에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때마침 안개를 뚫고 번개가 내리쳤고, 빛이 원을 그리며 마차 앞쪽에 맴돌았죠. 곧이어 꼬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어요. 그리고 사방에서 들리던 울음소리는 날카롭고 어지러운 비명으로 바뀌었죠. 새까맣게 그을린 고기의 악취가 진동하며 제 코를 찔렀고, 안갯속에서 퍼덕이던 형체들은 핏덩어리가 되어 펑펑 터져나갔어요. 날개 달린 악마 중 하나가 피에 젖은 땅에 떨어졌고, 그 괴상한 몸뚱아리는 불에 그을려 연기를 내뿜고 있었죠. 악마는 힘없이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다시 날아오르려고 몸부림쳤어요. 하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죠. 그리고 마침내 안갯속에서 그가 나타났어요. 저를 구해준 그 사람이요."


"하!" 망토를 걸친 자가 불빛 너머에서 나무에 털썩 기대며 경멸하는 투로 침을 뱉었다. 갈란테아는 두건을 쓴 사내를 잠시 바라보며 그 천박한 행동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시하고 이야기를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 구원자는 괴물을 모두 처치하고는 고요하고 침착하게 제 앞에 섰어요.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에너지로, 자신의 칼과 칼집에 묻은 괴물들을 피를 닦아냈죠. 그리곤 제 앞에 무릎을 꿇더니 감미롭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내 마음을 고요하게 달래주며 말했어요. '걱정 마라, 꼬마야. 넌 안전하단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 저주받은 날, 안갯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모든 희망이 사라졌던 그때... 제 기도에 누군가 대답해준 거죠. 하지만 제 기도에 응답한 건 신이 아니었어요." 갈란테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바로 그 유명한 마법사... 알주르였죠."


Chapter 2


"그래서 음유시인 생활을 그만둔 거야? 스노우드롭이란 이름도 버리고?" 하플링 재단사가 질문을 던졌다.


"에이 무슨, 아니에요!" 갈란테아가 답했다. "그때 시작한 거예요!"


'그럼, 왜 그만둔 건데? 네 나이 정도면 발라드를 100곡, 아니 1000곡은 지어도 모자랄 판인데!'


갈란테아는 머리를 기울이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는, 갈란테아가 바이올린을 켜지 않기로 다짐한 이후로 수도 없이 들어왔던 질문이었다. "삶은 변화하기 마련이니까요. 때로는 변화하는 삶에 맞춰 같이 변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잖아요."


갈란테아가 자연스레 질문을 회피하자 하플링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구겼지만, 머리를 끄덕이며 갈란테아의 말에 동의했다.


"그 대단하다는 마법사 얘기나 더 해봐..." 병사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유명한 마법사는 개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갈란테아의 이야기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뒤쪽에 앉은 남자가 말을 던졌다. "악명 높은 거겠지! 그 남자는 반역자에 미치광이야! 현상금이 걸린 놈일 뿐이지, 소녀들을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고."


"어이, 거기 말조심해, 친구!" 드워프가 갈란테아의 이야기를 지지하기 위해 나섰다. "뭐가 어쨌든 간에, 그 마법사가 여기 아가씨를 구해줬잖아.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고."


"그런데 대체 왜?" 상인이 팔을 좌우로 벌리며 끼어들었다. "아니, 도움 될 게 뭐 있다고 이 아이를 구한 건데? 아, 상처받지는 말고, 꼬마야. 모름지기 마법사라고 하면 더 중요한 일에 시간을 쓰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냥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걸까? 그래서 그냥 '에라이, 구해주고 말지.' 이러고 구해준 거라고? 나는 영 믿기 힘들어서 말이야."


"너 말곤 다 믿어. 머리는 뒀다 어디다 쓰냐!" 드워프가 따졌다. "마법사는 모든 걸 볼 수 있다고! 순간이동도 할 수 있어! 손가락만 튕기면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지. 다 아는 얘기잖아."


"그래, 그건 당연히 알지. 누가 모른대? 근데 이 경우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야. '어떻게' 구했는지가 아니라 '왜' 구했는지가 궁금하다니까. 그러니까 다시 물어봐야겠어... 대체 왜?"


"영웅이란 원래 그런 사람들이잖아?" 또 다른 관중이 말했다.


갈란테아는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홀짝였다. 갈란테아는 이런 토론을 즐겼으며 이게 얼마나 민감한 주제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영웅은 사람들을 구해야지!"


"구하긴 무슨! 마법사란 놈들은 피도 눈물도 없어. 계산적인 놈들이라고. 놈들이 우리 문제에 신경을 쓴다? 그건 우릴 돕는 게 자기한테 이득이 되니까 그러는 거야."


"그럼 그 날아다니는 괴물들을 잡아서 무슨 재료나 소환 의식에 쓰려고 그랬나?"


"아니, 그런 일은 마법사가 아니라 견습생들이 담당하잖아."


"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 아닐까? 재미나 좀 보려고..."


"허영심!" 경멸을 담은 거친 목소리가 야영지를 가르며 토론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잘난 자존심 때문이겠지!" 여행자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야영지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미 시들어버린 오크나무 밑동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는 후드 쓴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은 그가 비지마에서 캐러밴에 합류한 뒤 처음 꺼낸 말이었다. 캐러밴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벙어리나 덜떨어진 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이들은 후드 쓴 남자를 바라보며, 터져 나온 고함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이어갈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남자가 그 후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흠흠" 이 어색한 침묵 속에서 하플링이 말을 꺼냈다. "미안하군. 흠, 아마 알주르는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멋진 기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지."


"과연 그런 이유였을까요?" 갈란테아가 신기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리신 거죠?"


"아, 그게 말이지, 믿을지 모르겠지만 내 조상님 중 한 분이 바로 그 알주르가 자랐던 영지에서 일하셨거든." 하플링은 찢어진 손수건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내며 말을 이어갔다. "조상님이 가끔은 과거 얘기를 해주곤 하셨어. 옛날얘기 말이야. 그래서 나도 어린 시절에 많은 얘기를 듣..."


"아유, 그만요! 쓸데없는 얘기는 됐고요." 갈란테아가 말을 끊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아, 그래, 미안하군. 그래서... 음... 그게... 참 놀라운 아이가 있었는데 말이야..."


Chapter 3


"아, 아니야. 뜻밖의 아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고! 사과하지, 표현을 잘못했군. 내 말은, 어떻게 말해야 하나... 좀 더 '쌍놈의 자식'에 가까웠지. 알주르는 아기였을 때, 마리보 외곽에 있는 귀족의 저택 앞에 버려졌어. '이 아이의 어미는 죽었소. 누군가 잘 키워 주시오.'라는 간단한 메모랑 함께 말이야."


재단사는 자신이 앉아 있던 넘어진 나무 밑동에서 뛰어오르더니, 야영지 모닥불 주변을 돌아다니며 형편없이 무슨 해설자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알주르의 엄마는 평판이 안 좋은 이웃집 창녀였을 거야. 그 저택의 귀족이란 작자들은 너무나 방탕해서 누가 아빠인지 가려내기도 힘들었겠지. 귀족들은 자기 자식일지도 모르는 아이를 늑대한테 먹이로 줄 수는 없었기에 결국 알주르를 거두어들이게 됐어. 하지만 행복한 결말 같은 건 없었지.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 같았기에, 남자들은 알주르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지 않았거든. 여자들은 동정심에 알주르를 챙겨 줬지만, 다들 알다시피 동정이란 건 애정에 비하면 하찮은 대체품에 지나지 않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알주르의 형제자매들은 알주르의 출신이 천하다며 알주르를 무시하고 놀리곤 했어. 그럴 때마다 알주르는 영지에 있는 도서관에 홀로 숨어들곤 했지. 알주르는 밤낮으로 책을 읽으며 놀라움으로 가득한 세상과 멋진 영웅들의 용맹한 이야기를 접했어. 그러던 중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었어. 내 기억이 맞다면... 메틴나의 마테오 경이 쓴 '기사도의 실현'이었을 거야. 알주르는 기사들의 고귀한 행동과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 기사도라는 미덕에 푹 빠졌지...


그래서 알주르는 계속해서 영지 주변과 외곽을 돌며 자신의 고결함을 증명하고자 노력했어. 명예, 연민, 자비 같은 거. 다들 알지? 옛 소설에 나오는 기사들처럼 말이야.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알주르는 항상 최선을 다했어. 이웃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였기에, 용기라는 미덕을 증명할 수 없었어. 고작 꼬맹이가 이야기에 나오는 대담한 기사처럼 용맹함을 증명할 수는 없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러던 어느 날, 알주르는 시장에 심부름을 다녀오게 됐어. 그런데 우연히 도적단이 알주르가 타고 있던 마차를 습격했지. 다른 친구들은 재빨리 도망쳤어. 뭐, 도망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러 갔을 수도 있고. 하지만 알주르는 도망치지 않았어. 용기를 증명해야 했거든. 그래서 알주르는 겁도 없이 나서서 도적단과 맞섰지...


알주르는 몇 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발견됐어. 의식을 잃은 채 길옆에 누워 있었는데, 온몸에 멍이 들고 피투성이였지. 어찌나 많이 맞았는지, 몸을 일으키는 데에만 몇 주나 걸렸어! 하지만 결국 일어났지. 모두가 놀랐지만, 도적단과 만난 알주르는 자신의 고결함을 증명하겠다며 오히려 더욱 강하게 결의를 다졌지. 그리고 이번엔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어... 이 겁없는 꼬마는 오히려 기회를 찾아 나섰지.


하지만 결국 또다시 흠씬 두들겨 맞고 배수로에 버려진 채 발견됐어. 이번엔 목숨이 위험할 정도였지. 하지만 이런 시련도 이 아이의 결의를 꺾을 순 없었어. 알주르는 계속해서 기회를 찾아다녔고, 또다시 얻어맞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금 회복하고 일어났지. 절대 멈추지 않고 계속 그러길 반복했어. 그러던 어느 날, 특별한 일이 생겼지.


알주르가 실종된 거야. 귀족들은 아내들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수색을 시작했지. 그러다 뒷골목에서 알주르를 찾아냈는데, 알주르는 다친 상태가 아니었어. 다치긴커녕 아주 멀쩡했지. 알주르는 충격을 받은 채, 자기 앞에 쓰러져 있는 건장한 남성 세 명을 바라보고 있었어. 세 구 모두 검게 그을려 있었지.


그래, 알주르의 혈관에는 혼돈이 흐르고 있었던 거야. 오랜 시간 알주르의 몸 안에서 잠자고 있던 이 위대한 힘이, 마침내 불타오르며 해방된 거지. 알주르는 마법을 쓸 수 있었지만... 그걸 제어할 수 없었어. 그래서 알주르의 가족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강력한 마법사를 불러 소년에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 자신의 힘을 제어할 수 있도록 말이야. 알주르는 결국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계속 가르침을 받으며 뛰어난 마법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어... 우리가 오늘 밤 이 자리에서까지 떠들고 있는 바로 그 마법사 말이야.


난 알주르의 어린 시절이 알주르에게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알주르는 여전히 기사도라는 미덕을 지키려 한 거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거니까. 그래서 알주르가 문제를 해결하려 나선 거야. 항상 그렇게 해 왔으니까 말이야.


뭐,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내 생각은 그래..."


여행자 무리 중 몇 명은 중얼거리고 몇 명은 속삭이며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갈란테아가 입을 열자, 다들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흥미로운 생각이네요." 갈란테아는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 맞아요. 어린 시절의 경험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죠. 하지만 저는 알주르가 오로지 기사도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건 아니라고 봐요. 뭔가 더 강력한 무언가가 영향을 준 거 같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그 무언가가요..."


"그래? 그게 뭔데?" 드워프가 물었다.


"사랑이요."


Chapter 4


"사랑?!" 상인이 소리쳤다. "아주 헛소리를 하고 있구먼! 사랑이라고?! 그 남자는 지 잘났다고 엘란더군의 절반을 학살한 사람이야!"


"아,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이에요." 갈란테아가 대답했다. "제가 '사랑'이라고 한 건, 알주르를 두 번째 만났을 때 뭔가 찾아냈기 때문이에요. 어쩌다 보니 두 번째로 저를 구해 줬을 때 말이죠. 두 번이나 구해 줬다고요." 갈란테아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운명의 실타래가 꼬였어요. 전 어느 순간 제 자신이 저주에 걸려 있다는 걸 깨달았죠. 네, 진짜로요!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저주 때문에 노래하는 데 문제가 생겼죠."


하플링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켜지 않는 거였군!"


"아뇨, 아뇨. 그 반대예요. 오히려 그 저주 때문에 평범했던 제 노래가 매력적으로 변했거든요. 제 말은... 노래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되었다는 얘기예요." 갈란테아가 미소 지었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면, 리듬과 운율에 맞춰 노래가 튀어 나왔어요."


여행자 중 몇몇은 갈란테아가 재밌는 이야기를 빙빙 돌려서 말한다고 생각하며, 흥미롭다는 듯이 웃음 지었다.


"처음엔 진짜 엉뚱한 소리만 나왔어요. 너무 이상해서 웃길 정도였죠. 그래도 보수는 나쁘지 않게 들어왔어요. 근데... 돈이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일상생활이 힘들어졌으니까요. 밤낮없이 노래만 부르게 됐잖아요. 한 단어만 말하려 해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단어에 맞춰 시구가 흘러나왔어요. 결국 전 도움을 받기로 했죠. 정말 부끄러운 경험을 했거든요. 장례식에 참석 중이었는데 별 생각 없이 정말 멍청한 질문을 했어요..." 갈란테아의 볼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화장실이 어디냐고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장례식에 가질 못해요. 그때 기억이 떠오를까 봐 부끄러워서요." 갈란테아는 그렇게 말하며 몸서리쳤다. "몇 달이 지났는데 어떠한 치료법도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운명이라는 교활한 여신이 다시 한번 개입했죠.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그때 그 마법사와 함께 시골 여관에 있었어요..."


"저는 알주르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당연히 다시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알주르는 훨씬 중요한 일이 있다며 제 부탁을 거절했어요. '그런 망상에서 깨기 위해 도와 달라고 할 거면, 나 말고 다른 덜떨어진 놈한테 부탁해.' 하지만 저는 계속 알주르 곁에 있었어요. 알주르는 제가 얼마나 고집이 센지 잘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알려 줬죠... 저는 3일 내내 노래를 불렀어요. 발라드, 자장가, 시구, 성가까지 생각나는 건 전부 다 불렀죠. 알주르는 마법으로 제 입을 막으려 했지만, 당연히 의미 없는 짓이었어요. 저주는 계속됐고, 결국 알주르가 항복했죠. 저한테 그만 좀 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제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도록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다면서요."


"그게 대체 사랑이랑 무슨 상관인데?" 병사가 물었다.


"음, 그래서 저희는 제가 처음 저주에 걸렸던 마을로 이동했어요. 그리고 가는 길에 여관에서 묵었죠. 어느 날 밤, 알주르는 동네 사람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근데 당시의 저는... 꽤 호기심이 많았죠. 뭐, 어릴 땐 다들 그러잖아요. 그래서 알주르의 물건을 뒤져 보기로 했어요. 이상하면서도 멋진 장신구가 한가득 있더라고요. 저도 여자라 그런지, 눈길이 가는 게 하나 있었어요. 꽃처럼 생긴 메달이었죠. 자세히 보니 백합이었어요. 그래서... 그걸 목에 걸어 봤는데... 그때 딱 알주르가 돌아왔어요..."


"알주르는 곧바로 불같이 화를 냈어요. 저한테 소리치면서 엄청 혼냈죠. 그렇게 화난 건 처음 봤어요. 저는 깜짝 놀랐고... 조금 이해가 안 됐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작 장신구 하나잖아요. 제가 뭐 흠집 낸 것도 아니었고요." 갈란테아는 미소 지으며 얘기를 이어 갔다. "그때는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알주르는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 화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어요. 그러고는 술 냄새를 풍기며 난롯가 근처에 앉아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봤죠. 슬픔이 분노의 자리를 대신한 것 같았어요. 그때, 참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알주르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거예요."


"알주르는 오래전에 누군가를 위해 메달을 모았다고 말했어요... 정말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요. 심지어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메달에 마법을 부여했다고 하더라고요. '릴리아나.' 알주르가 나지막이 말했어요. 그러고는 애정이 넘치는 목소리로 릴리아나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갔어요. 술에 취해 저한테 릴리아나와의 추억을 말해 줬죠. 알주르는 릴리아나의 야망에 찬사를 표했어요. 제가 들은 내용을 정리하자면, 릴리아나는 안전한 세계를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던 거 같아요.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는 세계 말이에요. 정말 엄청난 야망이었어요.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일생을 바쳤죠. 근데 그 일생이라는 게 슬프게도 소서리스치고 너무 짧았던 거였어요."


"알주르는 릴리아나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저 술에 취해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잠시 침묵에 빠지더니 이내 잠들었죠." 갈란테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기억을 떠올렸다. "알주르는 '사랑'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알주르가 릴리아나에 관해 얘기하는 방식이나, 릴리아나와의 추억을 떠올릴 때 알주르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건 일리가 있네." 하플링이 인정했다. "잠깐... 설마, 알주르가 릴리아나의 꿈을 이어 간 거야? 릴리아나가 죽은 뒤로도 그 꿈을 이어 갔다고?!"


"네, 저는 그렇게 믿어요. 떠난 자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니까요."


"그랬군!" 드워프가 펄쩍 뛰어오르며 고개를 돌려 상인을 쳐다봤다. "그럼 괴물한테서 사람들을 구해 주는 게 말이 되네! 이제 만족하셨어요, 선생님? 하!"


상인은 드워프의 노골적인 도발을 무시하며 말했다. "아니, 아니. 알주르가 그 '꿈'을 위해 대체 뭘 했다고 하는 거야? 자신의 사랑을 잊지 못해 대륙을 돌아다니며 괴물을 죽인다고 해도 괴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봤자 티도 안 날걸? 고작 한 명이잖아?"


"한 명이요? 에이, 아니에요." 갈란테아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한 명이라니요..."


Chapter 5


"...위쳐!" 병사가 소리쳤다. "위쳐를 말하는 거야!"


"뭐라고?" 양가죽으로 감싼 플라스크를 들고 자연스럽게 술잔을 채우며 상인이 되물었다.


"위쳐 말이야. 내가 듣기로는 위쳐라고 했어." 병사는 꺼칠꺼칠한 턱을 긁으며 말했다. "뭐랄까... 마법으로 강화된 용병이야. 엄청 빠르고 강한 데다, 평범한 인간하고는 비교도 안 되지. 듣자 하니,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괴물을 잡아 주고 보수를 받는다고 하던데."


"내가 보기엔 그냥 헛소리 같은데"


"아, 그러셔요? 뭘 알아야 얘기를 하지."


"방금 '용병'이라면서? 그쪽 바닥을 잘 아는 친구가 있어서 말이야." 상인은 어둠 속에 있는 후드 쓴 남자를 가리켰다. "자기가 용병이라고 하더라고. 뭐, 용병이라기보다는 뒷골목 청부업자에 더 가까운 거 같지만. 맞지, 청부업자 양반?"


후드 쓴 남자는 대답 대신 침을 뱉었고, 상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예의는 좀 부족한 친구네. 하지만 사람 죽이는 실력은 엄청나다니까. 우연히 본 거지만 말이야. 마침 나도 괜찮은 경호원을 찾던 참이라, 돈 좀 쥐여 주고 마리보까지 안전하게 보호해 달라고 했지. 꽤 괜찮은 거래였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위쳐 얘기는 좀 아닌 거 같아. 청부업자 양반! 자네도 칼 좀 쓰는 업계에서 먹고 사는 입장인데, 이 '엄청난 괴물 사냥꾼'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쇼?"


후드 쓴 남자는 고개를 기울이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괴물을 죽이는 자라... 그래서? 별로 특별할 건 없는 거 같은데. 그냥 잠자리에서 들려주는 얘기 정도지."


"그럼 그렇지!" 술에 취한 상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잠자리에서 애들 들려주는 얘기라잖아!"


"아니야! 진짜라니까. 믿을 만한 사람들한테 들은 거라고. 다들 완전히 똑같은 얘기를 하더라니까. 그 많은 사람이 어떻게 다 똑같은 거짓말을 하겠어? 안 그래?!"


"원래 거짓말이라는 건 그렇게 빨리 퍼지는 거야, 이 친구야. 진실보다 빠르게 퍼지기도 한다고."


병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봐, 자네가 말한 사람들이 괴물 잡는 사람을 못 봤다는 얘기가 아니야. 그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근데 그 '마법으로 강화된 병사' 얘기는 완전 개소리라니까? 알면서 왜 그래? 그리고 만약에 그..." 상인은 갑자기 그루터기에서 뛰어내리더니, 바닥의 돌을 쥐고는 야영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쥐들에게 던졌다.


쥐들은 찍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그래. 만약에 그 '위치'가..."


"...위치가 아니라 위쳐라고!"


상인은 팔을 크게 휘저었다. "그래! '위쳐!' 자네랑 자네 친구들 말처럼 진짜 그런 놈들이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한테 그런 놈들이 대체 왜 필요한데? 괴물들이 무서워서? 그래, 가끔 불쌍한 놈들이 하나둘 죽긴 하지만, 그건 걔들이 부주의해서 그런 거잖아? 멍청하게 안전한 길로 안 다니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다 아무도 모르게 어디 늪지대에서 잡아먹히는 거고."


"어이,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야? 어디서 주둥이를 놀려?!" 드워프가 소리쳤다.


"맞는 말이잖아! 안전한 길로 이동할 돈이 없다고? 그럼 그냥 얌전히 안전한 곳에 있으면 되잖아. 아예 땡전 한 푼 없거나 나처럼 좋은 에스코트를 고용하기엔 돈이 아깝다고? 그럼 애초에 이런 외곽까지 싸돌아다닐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괴물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거야. 모르겠어...? 이 사회의 쓰레기를 없애 주잖아. 사회를 깨끗하게 해 주는 거라고."


병사는 분노를 억누르며 이를 꽉 물고 답했다. "그러는 당신은 뭐가 다른데?"


"집중이란 걸 할 줄 모르나? 아니면 귀가 먹었어?" 상인은 이제 야영지 외곽을 돌아다니고 있는 청부업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 난 내 안전에 신경을 쓴다니까. 어떤 위험에도 충분히 대비하고 있단 말이지."


"계속 그딴 식으로 주둥이를 놀리는 걸 보니 처맞을 준비도 되어 있나 보지?" 드워프가 쏘아붙였다.


"...조용!" 청부업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제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모닥불이 비치지 않는 어둠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조용히 하시오. 시끄럽게 떠들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오." 청부업자는 자신의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야영지 밖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아니, 거기." 상인이 말을 이어갔다. "어딜 가려는 거야, 청부업자 양반?" 하지만 청부업자는 한마디 대답도 없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맞는 말이네요." 갈란테아가 말했다. "시간이 꽤 늦었어요. 그리고 전 좀 쉬고 싶고요." 갈란테아는 일어나 자신의 텐트로 걸어갔다. "내일은 꽤 긴 하루가 될 거예요."


"그래, 그렇지." 드워프가 마지막 남은 벌꿀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긴 하루가 될 거야."


그리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캠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잠들었다. 심지어 불침번도 잠을 이겨내지 못했다...


...하지만 캠프 근처에서는 이 어둠 속에서도 붉게 빛나는 두 눈이 창백한 달빛 아래 번득이고 있었다.


Chapter 6


드르렁거리며 코 고는 소리와 꺼져가는 모닥불의 타오르는 소리만이 야영지에 울려 퍼졌다. 저 높은 곳의 구름 사이로 밝게 뜬 보름달이, 잿불이 비추는 곳 너머를 으스스한 느낌의 색상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텐트 중 하나가 움직이더니, 졸음에 취한 상인이 텐트의 앞 덮개를 열고 나왔다. 상인은 야영지 외곽의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다가, 모닥불 주변에 모여 잠에 빠진 여행자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상인은 어두운 곳을 찾아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찍!


상인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휘청이며 자기 발에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망할!"


쥐 한 마리가 근처 나무 그루터기 위에서 상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은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찍찍거렸다.


"이 쥐새끼가!" 상인은 날카롭게 외치며, 바닥에서 돌을 한 움큼 집어 분노를 담아 쥐에게 던졌다. "저리 꺼져!"


하지만 쥐는 돌무더기 세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더욱 거세게 울었다.


"안 도망간다, 이거지?" 상인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어디 제대로 맛 좀 봐라, 새끼야. 아, 그렇지!" 상인은 커다란 돌을 골라 쥐가 있는 쪽으로 끌고 왔다. "난. 분명히. 너한테. 경고했다!" 상인이 무거운 돌을 던지자, 쥐는 그제야 깜짝 놀라며 가까운 덤불 속으로 도망쳤다.


"하!" 상인은 의기양양하게 미소지었다. "이래야 말을 듣는다니까..."


찍, 찍!


상인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 무리의 쥐 떼가 상인 앞에 모여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찍! 찍! 찍!


그리고 덤불 속에서 더 많은 쥐가 기어 나와, 상인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떻게..." 상인이 겁에 질려 겨우 말을 내뱉었다.


쥐들은 상인을 노려보고 있었고, 수많은 수의 작은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청부업자?" 상인이 속삭였다. "청부업자... 어... 어디 있..."


그때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솟아오르며, 상인을 비추고 있던 달빛을 가렸다. "청부업자?" 상인은 몸을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높은 곳에서 붉게 타오르며 상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눈과 거품이 가득한 거대한 입, 구역질 나게 침이 떨어지고 있는 가늘고 긴 송곳니가 상인을 반겨 주었다.


상인은 겁에 질려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란 여행자들이 텐트와 잠자리에서 쏟아져 나오자, 혼란을 틈타 쥐 떼가 찍찍 소리를 내며 야영지를 휘젓고 다녔다.


상인의 절단된 상체가 허공을 가로질러 야영지 중앙에 떨어지자,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온몸이 근육과 상처로 가득한 털북숭이 괴물이 나타났다. 놈은 거대한 입을 벌려 소리를 질렀고,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드워프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쳐냈다. 드워프는 야영지를 가로지르며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 버렸다.


사방을 쏘아보던 거대한 설치류는 곧 혼란에 빠져 텐트에서 나오고 있는 갈란테아를 바라보았다. 놈은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더니, 갈란테아를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기 시작했다.


팍!


석궁의 볼트가 괴물의 어깨를 꿰뚫었다. 놈은 비명을 지르며 볼트를 빼내고, 볼트가 날아온 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퍽!


또 다른 볼트가 가슴에 명중했다.


"물러나!" 덤불 속에서 청부업자가 뛰쳐나왔다. 청부업자는 석궁을 내려놓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검날이 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야수는 크게 포효하고는 청부업자에게 달려들었다. 청부업자는 칼을 들어 공격에 대비하며, 정확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기다렸다... 그리고 달려드는 괴물을 왼쪽으로 피하며 등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진홍빛 피가 야영지에 흩뿌려졌다.


후드 쓴 남자는 놀라운 속도와 엄청난 정확성으로 손쉽게 놈을 압도했다. 넋을 잃을 정도로 멋진 검술과 심리전, 반격이 이어지자 사방엔 피가 튀기고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괴물 쥐는 수많은 상처 앞에 굴복했다는 듯이 낮게 울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앞으로 쓰러졌다. 놈의 거대한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야영지의 흙을 적셨다.


남자는 칼을 기울이며,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그 순간 구경꾼들은 헉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괴물이 팔을 뻗어 청부업자의 목을 움켜쥔 것이었다. 야수는 으르렁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목을 잡고 높이 들어 올렸다. 피투성이 몸에는 잘린 부위가 어느새 아물어 있었다. 심각한 부상과 절단된 근육들이 스스로 치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검을 떨어뜨리고,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털투성이 손을 꽉 움켜잡았다.


야영지 사람들은 괴물의 손아귀에서 발버둥 치는 청부업자를 바라보며 멍하니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 모두가 놀랄 일이 벌어졌다. 청부업자는 설치류 괴물의 얼굴 쪽으로 팔을 뻗더니 손가락으로 이상한 문양을 그렸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와 괴물을 덮쳤고, 놈의 얼굴과 상체는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괴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남자를 놓아주고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청부업자는 가죽으로 감싼 구슬을 꺼내더니 구슬의 심지에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이고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거대한 괴물의 발치에 던졌다.


폭탄은 치직거리며 불꽃을 내뿜었다...


콰쾅!


쥐인간은 폭발했고, 남은 것은 검게 그을린 살덩이와 뼈 무더기뿐이었다.


살아남은 여행자들은 피와 내장으로 뒤덮인 채, 충격에 빠져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청부업자는 무참히 난도질당한 상인의 시체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상인의 가방을 뒤지더니 짤랑거리는 주머니를 꺼냈다. 남자는 얼빠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생존자들의 얼굴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머니를 챙겼다.


병사는 흔들리는 손가락으로 후드 쓴 남자를 가리키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힘겹게 한 단어를 내뱉었다. "...위쳐."


Chapter 7


먼지투성이 길을 달리며 마리보로 향하는 캐러밴 위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갈란테아는 캐러밴 무리의 후방에 위치한 수레의 뒤에 앉아 있었다. 말을 탄 위쳐가 천천히 다가오자, 갈란테아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위쳐를 바라봤다.


갈란테아는 밝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어젯밤 있었던 일 말인데, 정말 고마웠어요."


위쳐는 칭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마지 못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알주르가 또 날 구해준 셈이네.' 이렇게 생각하며, 갈란테아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위쳐는 이를 꽉 물었고, 그의 콧잔등은 붉게 달아올랐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갈란테아가 물었다. "제 감사 인사를 들으러 오신 건 아닌 거 같아서요."


남자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알주르를 알기는 하는 건가?"


"아... 그냥 단순히 아는 정도가 아니죠."


"그렇다면 왜 진실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하는 거지?" 위쳐는 목을 살짝 비틀었다. "망상에 빠졌나 보군. 아니면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갈란테아는 미소 지었다. "진실이라는 게 꼭 하나란 법은 없죠. 가끔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법이니까요."


위쳐는 불편하다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잠시 후 불만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랑'이라니..." 위쳐는 비난하듯이 말했다. "알주르가 그렇게 다른 이들을 신경 썼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알주르는 자신의 행동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신가 보네요." 갈란테아는 위쳐를 바라보며 하품을 참았다. "어젯밤에 잠을 못 잤어요. 뭐, 이미 아시겠지만요. 그러니 제가 잠들어버리기 전에... 어서 말해보세요."


"알주르와 그 추종자들이 어떻게 위쳐를 만들어내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나?"


"뭐, 사랑으로 만들진 않겠죠..."


"놈들은 어린 소년을 데려가지. 길거리에서 납치하거나, 필요하다면 부모에게 돈을 내고 데려가기도 해. 신선한 실험체를 위해선 무엇이든 한다고. '꼭 어린 아이여야 해.' 놈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지. 늙은 백발의 마법사 코시모는 순응에 관해 맨날 헛소리를 늘어놨어... 그놈과 알주르는 우리를 물에 젖은 점토에 비유하곤 했지.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야. 얼마나 덜떨어진 생각인지... 놈들은 너무 오래 살면 틀이 망가진다고 했어. 점토가 굳어서 부서지고 갈라지기 때문에, 다 큰 어른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건 어렵다고 말이야. 결국, 돌연변이 시술에 적합한 자는 어린아이뿐이야. 아니, 돌연변이 시술을 받을 기회가 있는 자라고 하는 게 더 맞겠군. 어차피 시술 후엔, 많은 아이가 부서져 버리거든." 위쳐는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 것처럼 갈란테아를 응시했다. "내가 아는 많은 아이가 이제 무덤 속에서 편히 쉬고 있지."


갈란테아는 위쳐의 눈빛을 피하며 길가의 목초지를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하지? 죽은 아이들 얘기로 발라드라도 쓸 텐가?"


갈란테아는 고개를 돌려 위쳐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우린 직접 그 아이들을 묻어야 했어. 아이들의 신체는 짓이겨지고, 얼굴은 뒤틀려 있었지. 게다가 그 입은 최후의 비명을 지르던 그 순간 그대로 벌어져 있었고. 웃긴 건, 이들이 운이 좋았다는 거야. 빨리 끝난 축에 속했으니까. 살아남은 불쌍한 아이들은 알주르가 만든 또 다른 '시험'의 제물이 됐지. 알주르는 이게 무슨 대단한 업적이라도 된다는 듯이, 우리는 선택받았고 그 가치를 증명하라며 '시험'이라고 불렀어. 우리가 이 지옥의 길을 걷겠다고 선택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넌 알주르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알주르가 행한 일은 모두 자신을 위한 행동이자 오만의 산물이니까. 남을 돕는다라... 말도 안 되지. 물론, 남들이 알주르를 지켜보고 있을 때는 가끔 그렇게 착한 척했을 수도 있어. 알주르의 추악한 계획에 돈을 대준 멍청한 녀석들이 찾아올 때처럼 말이지. 하, 귀족들 앞에서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정말 대단했어. 귀족들에게 굽신거리며 우릴 자랑하고, 자신의 성공과 실력을 과시했지. '이 위대한 알주르가 여러분을 위해 만든 작품을 보십시오!' 같은 거만한 소리나 하고..."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귀족들이 자신의 투자에 만족하고 돌아가면, 알주르는 다시 차갑게 무관심으로 일관했어. 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야. 우린 다음 시험이 준비될 때까진 알주르를 보지 못했고, 알주르를 본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불행이었지. 하... 우린 그저 그놈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어. 알주르의 유산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였지." 위쳐는 생각에 잠긴 채 눈을 번득였다. "... 놈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젖은 점토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야."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정말 대단한 이야기네요, 위쳐." 갈란테아는 가볍게 웃었다. "혹시 재밌게 이야기하는 방법을 공부라도 하셨었나요?"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진실은 변하지 않아... 관점의 차이 같은 건 개소리지." 위쳐는 흙에 가래를 뱉으며 다시금 암울한 기억에 잠겼다.


갈란테아는 생각에 잠긴 채 마차 옆에서 달리고 있는 위쳐를 지긋이 바라봤다.


"있잖아요..." 갈란테아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저희를 도와주신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그건 알아주셨으면 해요."


위쳐는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전방으로 가봐야겠어... 마리보까지 무사히 도착해야 하니까." 위쳐는 이렇게 말하며 바로 추억에서 빠져나왔다. "편히 쉬라고." 그 말을 끝으로, 고삐를 잡은 위쳐는 캐러밴의 전방으로 질주해 나아갔다.


Chapter 8


갈란테아는 수레 뒤편에 비스듬히 누워, 편안하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앞쪽 말들이 걸어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은 천천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 저 높은 곳에서는, 한 무리의 새들이 원을 그리며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때 그중 한 마리가 끔찍한 울음소리를 냈다. 갈란테아는 눈을 가늘게 떴고, 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넓고 거친 날개가 천천히 펄럭였고, 그 뒤에는 비늘로 뒤덮인 긴 꼬리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날아다니는 공포는 서서히 하강하며 캐러밴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놈이 울부짖으며 폭발했고 이내 고깃덩이가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도 한 놈씩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피와 내장의 비가 쏟아졌다.


알주르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겁먹지 마, 꼬마야. 넌 안전하단다."


핏빛 폭우는 시청 외곽에 이르러 깨끗한 물로 변했다. 창문 너머에서 따뜻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청 내부에는 수척해진 사람들이 기침을 하고 있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몸을 떨고 숨을 몰아쉬었다. 밀랍을 칠한 검은색 오버코트를 입고 부리가 달린 마스크를 쓴 사람이 지팡이로 사람들을 찔러 보고 있었다.


어린 갈란테아는 소년 음유시인 같은 옷을 입고 상자로 대충 만든 무대 위에서, 병자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켜고 밝은 노래를 불렀다. 병자들은 고통 속에서도 퀭한 눈으로 기쁘게 미소 지었다.


그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불쌍한 어린 양이여. 너에게도 이 아픔이 깃들었구나. 아픔이 저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어."


갈란테아는 연주를 멈추고 악기를 내리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갈란테아의 앞에는 한 무리의 벌거벗은 시체가 엉겨 붙은 채 썩어 가고 있었다. 시체는 모두 부리 달린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하나둘 깍깍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결국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촛불이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과 으스스한 침묵만이 방을 가득 채웠다.


"죽음이 다가오고, 네 빛은 사라지리라."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두려워 말라. 델마께서 네 아픔을 치료해 주시리니."


중앙에 있는 난로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며, 작은 오두막 내부를 환히 비추었다. 한쪽에는 장신구와 싸구려 보석들이 높이 쌓여 있었고, 선반을 가득 채운 까마귀 무리가 까악 소리를 내며 날뛰고 있었다.


어린 갈란테아는 핼쑥하고 창백한 얼굴로 불 앞에 앉아, 건너편에 검은 깃털로 장식한 옷을 입고 있는 늙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서약을 하면, 노래하게 되리라." 늙은 여인이 어린 음유시인에게 이를 번뜩이며 말했다. "델마께서 네 생명을 보장하리라. 너는 살아남을 것이다." 여인은 웃으며 말했다.


난로가 달궈지며 불길이 솟아올랐고, 바닥의 목재까지 퍼져 벽을 타고 오르더니 이내 모든 걸 집어삼켰다.


외딴 숲 한가운데 위치한 오두막은 맹렬히 타올랐다. 타오르는 화염을 뚫고 끔찍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아이야!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갈란테아는 숲속에서 울먹이며 불에 탄 흔적을 바라보았다.


알주르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고개를 끄덕이거라, 스노우드롭. 그러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알주르의 손이 갈란테아의 어깨를 잡았다. 갈란테아는 옆에 서 있는 알주르에게 몸을 돌려, 피범벅이 된 알주르의 얼굴과 가슴을 바라봤다. 알주르는 갈란테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악의로 가득한 쓴웃음이 알주르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두 번이나." 알주르는 웃었다.


화염이 숲을 집어삼켰다.


흉측한 비명은 점점 커져만 갔다...


갈란테아는 눈을 뜨고 똑바로 앉았다. 피부가 땀으로 번들거렸다.


갈란테아는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다 수레가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근처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소리쳤다. "우리가 장난치는 것 같아? 물러서, 당장 물러서라고!"


갈란테아는 수레 뒤편에서 뛰어내렸다. 수레는 교차로 근처 여관 옆에 멈춰 있었다. 나무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중 교잡".


갈란테아는 수레 뒤로 돌아갔고, 거기서 농민 옷을 입은 사람들이 녹슨 칼과 낫, 쇠스랑으로 무장한 채 캐러밴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중앙의 키 큰 여자는 긴장된 손으로 석궁을 잡고 휘두르며 병사를 겨냥하고 있었다.


병사가 키 큰 여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그러고는 조금 공격적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굳이 이럴 것까진..."


팍.


볼트가 발사됐고 병사의 무릎에 명중했다. 병사는 신음하며 화살대를 붙잡았지만,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이 망할 년이!"


"나, 난 경고했어. 경고했다고." 키 큰 여자는 말을 더듬으며 구경꾼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다들 괜히 끼어들지 마! 안 그랬다간... 이렇게 될 줄 알아!"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서툰 움직임으로 홈에 다른 볼트를 장전했다. "불만 있는 사람 있어?"


여행자 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 키 큰 여자는 자신의 부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데려가, 길 막지 말고."


Chapter 9


"참 운수도 더럽게 좋네." 드워프가 또 다른 촛불에 불을 붙여 지하 저장고 구석의 나무통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불은 제발 조심히 좀 다뤄." 하플링이 경고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린 프라이팬 속으로 들어온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아, 걱정 마. 손이 떨리거나 하진 않으니까." 드워프는 촛불을 하나 더 켜서 선반에 올려두었다. "이 아래 얼마나 있었던 거요?" 드워프가 통 위에 앉아 있는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음... 오래되진 않았어요. 아마 며칠쯤?" 여관 주인이 여행자 무리를 돌아보며 말을 이어 갔다. "아마 손님들이 처음으로..."


"털린 사람들이라고?" 드워프가 끼어들었다.


"네, 죄송해요. 근데 너무 기분 나빠 하진 마세요. 저들은 도적 떼가 아니에요. 정말로요. 대부분 제가 아는 사람이거든요. 이 지역 농부나 도우미들이죠. 하지만... 끔찍한 가뭄이 계속돼서 사람들이 절박해진 거예요... 희망이 없어졌으니까요. 그래서... 다들 이러는 거죠."


갈란테아가 피범벅인 병사의 무릎을 감싸고 있는 누더기를 조이자, 병사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여행자의 머리 위로 위층 바닥을 걸어 다니는 발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천장에서는 먼지가 떨어졌다.


"친구분 일은 죄송해요. 저들도 의도한 건 아닐 거예요."


"걱정 마쇼, 괜찮을 테니. 안 그래, 친구?"


병사는 투덜댔다.


"근데 군 생활은 이제 끝났구먼." 드워프가 웃었다. "경계 근무랑 친해지겠네, 하!" 드워프가 웃으며 기름 램프에 불을 붙이자, 뒤쪽 벽에 그려진 커다란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장을 그려낸 그림이었다. 한쪽 부대는 흑백의 군기를 들어 올리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고, 다른 쪽 부대는 하늘에서 빗발치는 화염을 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 승리한 부대 한가운데는 빛나는 룬으로 둘러싸인 유명한 마법사가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끝없는 전쟁의 마지막 전투예요." 여관 주인이 여행자들에게 말했다. "이 그림은... '알주르의 이중 교잡'이에요. 근데... 저희는 엘란더에서 오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쪽 사람들한테 보여주긴 좀 그래서 이 아래에 걸어뒀죠. 안 보이게요." 주인은 웃었다. "하지만 여관 이름까지 바꿀 순 없었죠."


"그럼 진짜였던 거요?" 하플링이 캐물었다. "알주르가 마법으로 부대를 학살했다고?"


드워프가 램프를 잡고 그림을 비추며 말했다. "그래, 그런 것 같은데."


위층 사람들이 움직이자, 천장에서 먼지가 더 떨어졌다. 희미한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손님들도 알주르에 관한 얘기를 들었군요?" 여관 주인이 물었다.


"여기저기서 좀 들었지." 드워프가 패해서 도망가는 부대의 병사와 불에 타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병사를 보며 말했다. "살아남진 못했겠네."


여관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 그림에는 없지만, 알주르는 포탈을 열었다고 해요. 그리고 마법을 사용해 끔찍할 정도로 강한 무언가를... 다른 세계에서 소환했다고 하죠. 그때 하늘이 반으로 갈라지고 전장에 화염 소용돌이가 몰아쳤다는 얘기도 있어요. 용 같은 게 아니었어요. 용이 아니라... 훨씬 무시무시한 거였죠..." 여관 주인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게 뭐였든 간에 병사들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어요... 참혹한 패배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리고 엘란더 사람들은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었죠. 다음 날, 그들은 마리보의 공작에게 비지마의 왕좌를 넘겨줬어요. 끝없는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죠."


"이건 아니지." 드워프가 그림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완전 개 같잖아. 전투라는 건 동등한 조건에서 명예와 함께 싸워야 하는 거라고. 이건 전부... 말이 안 돼. 이렇게 죽을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그래, 그건 나도 동감이야." 하플링이 덧붙였다.


"결국 알주르가 한 거군요..." 갈란테아는 침울한 눈으로 그림 속 병사를 보며 말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드워프는 웃으며 말했다. "암요, 아가씨! 저도 잘 먹습니다. 다 살을 빼기 위해서죠!"


"아뇨, 이 아가씨 말이 맞아요." 여관 주인이 정정했다. "사실 끝없는 전쟁은 아주 지독한 전쟁이었어요. 몇 세대가 지나도록 끊임없이 피를 흘리며 싸웠죠. 그것도 단지 공작들이 조금 더 큰 왕좌를 얻기 위해서 말이에요."


"아, 나도 그 얘기는 들어봤지. 근데... 왜 그리 오래 이어진 거요?" 드워프가 물었다.


"음..." 여관 주인은 다시 나무통 위에 앉았다. "양쪽의 힘이 비슷했거든요. 그래서 둘 다 대승을 거두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진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결국 이길 거라는 희망이 생기다 보니... 두 공작과 그들의 아들은 물론이고... 아들의 아들조차 물러서지 않은 거죠. 그렇게 계속... 자신의 백성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거예요. 그럴 때마다 의무니, 명예니, 자부심이니 하면서 귀족들이 아랫것들의 희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핑계는 전부 들이밀었죠. 사실 '희생'이라고 하는 것도 웃긴 일이잖아요. 아마 이 근방에서는 자기 조상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울 거예요."


드워프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알주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여관 주인이 결론을 말했다.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렸을지 상상할 수도 없어요..."


드워프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래.. 하지만 이게 올바른 건 아니잖아.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타인의 운명에 간섭한 거잖아..."


"타인의 운명에 간섭하는 일..." 갈란테아가 미소 지었다. "...알주르가 제일 잘하는 거죠."


위층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러 퍼졌다.


쿵!


Chapter 10


위쳐는 먼지가 자욱한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다행스럽게도, 캐러밴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곤 길을 따라 쭉 늘어선 동물의 사체뿐이었다. 사체는 뼈가 깔끔하게 뽑혀 있었다. '가뭄 때문이군.' 위쳐는 추측했다. '불쌍한 것들'


위쳐는 교차로에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분명 지금쯤이면 하룻밤 묵고 가려고 캐러밴이 여관에 도착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반나절만 더 가면 마리보에 도착할 것이다... 위쳐는 생각에 잠긴 채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미 돈을 받았는데 왜 여기까지 온 것일까? 고용주도 죽었기에, 이제 위쳐에겐 보호할 의무도 없었다. 전혀 전문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위쳐는 가래를 모아 땅에 뱉었다. '그냥 시간 때우는 거야.' 위쳐는 생각했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위쳐의 예상대로, 여관 앞에는 익숙한 말과 수레가 위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된 것처럼 위화감이 느껴졌다...


위쳐는 말을 타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바닥에 흩뿌려진 흙을 살펴봤다. 그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안장에서 내려와 몸을 숙였다. '저항의 흔적이군.' 위쳐가 추측했다. '마른 핏자국까지... 더 볼 것도 없군.' 위쳐는 얼굴을 찌푸렸다. '망할.'


"대기." 위쳐는 말을 향해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리고는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 밖 벤치에는 노란색 더러운 튜닉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남자는 단검을 가지고 놀다가 위쳐가 다가오는 걸 보고는, 일어서서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미안하군, 형씨. 오늘은 영업 끝났어."


위쳐는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멍청해 보이는 남자가 여관 문 앞으로 가며 위쳐의 길을 막았다. "뭐야, 한번 해보자는 거야? 내가 방금 영업..."


바로 그 순간, 위쳐는 주먹을 내질러 남자의 복부를 강타했다. 남자는 바닥으로 쓰러지더니 숨이 막힌다는 듯이 바닥을 뒹굴었다.


"대기." 위쳐는 남자를 향해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리고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 테이블에는 도적단이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이 둘러앉아, 캐러밴에서 약탈한 장신구를 꺼내 보고 있었다. 위쳐가 여관에 들어서자, 다들 대화를 멈추고 여관에 들어온 침입자를 바라봤다.


"어디 있지?" 위쳐가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키 큰 여자는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테이블 위에 있는 석궁을 잡아챘다.


"귀찮게시리..."


위쳐가 눈을 돌리자, 여자는 시위를 당기고 석궁의 홈에 볼트를 끼웠다. "당신... 대체 누구야?" 여자가 말했다.


위쳐는 목을 살짝 꺾으며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다시 물었다. "어디 있지?"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주변 사람들이 위쳐를 포위했다.


"무슨 생각이지? 여기에 눌러앉으려는 건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나 털어먹으면서? 얼마나 그럴 수 있을까? 도시 경비대가 오면 전부 교수대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될 텐데."


"아니... 경비대는 도시의 폭동을 진압하느라 바빠. 이 가뭄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거든. 지금 여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 당연하잖아. 그럼 이제... 큰코다치기 전에 꺼져 주실까?"


위쳐는 고개를 기울이며 여자의 말을 경청했다. "흠..." 그때, 아래층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을 왜 잡은 거지? 그냥 털어먹고 보내주면 되지 않나? 그게 더 쉬울 텐데."


"음... 그게 말이지... 어..." 여자가 당황한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당신...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여자가 석궁을 들어 위쳐를 겨냥하며 말을 이어갔다. "명심해, 마지막 경고야."


"한마디만 하지..." 위쳐가 칼자루를 잡으며 말했다. "...얌전히 손 떼고 집으로 돌아가."


여자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멈춰..." 위쳐가 화를 억누르며 경고했다.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마침내 결심한 것이었다.


위쳐는 검을 뽑아 들었다.


팍!


볼트가 발사됐다.


위쳐는 부드럽게 검을 휘두르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볼트를 검날로 막아냈다.


챙!


검에 부딪친 볼트는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다른 갱단원 목에 명중했다. 갱단원은 숨을 헐떡거리며 피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졌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그녀는 충격에 빠져 넘어지며 석궁을 놓치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곧 침묵을 깨고 위쳐가 구경꾼들을 노려보며 물었다. "또 덤빌 사람 있나?"


갱단원들은 바로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의 의미로 손바닥을 보이며, 얼이 빠진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털북숭이 남자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 제발 살려주십쇼."


위쳐는 태연하게 검을 집어넣었다. "가... 꺼져."


갱단은 위쳐에게 눈을 고정한 채 조심스레 정문 쪽으로 움직였고, 정문에 이르자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밀치며 여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위쳐는 피 웅덩이 속에 쓰러진 불쌍한 사람을 내려다봤다. "운이 없는 친구로군..."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방을 둘러보던 위쳐는 구석에서 지하로 통하는 커다란 문을 찾아냈다.


아래층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위쳐?"


위쳐가 해치를 들어 올리자, 갈란테아가 나무 사다리에 발을 올린 채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란테아는 위쳐를 확인하자,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쳐는 잠시 갈란테아를 바라보더니, 가볍게 미소 지었다. "두 번이나."


Chapter 11


위쳐는 여관 옆의 얕은 둑 위에서 무덤을 파며 삽으로 한 번 더 흙을 퍼냈다. 잠시 알주르의 성에서 목숨을 잃은 돌연변이 형제들을 파묻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의 머릿속에 마법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나도 유감일세.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위쳐는 눈을 질끈 감으며 기억을 떨쳐내고, 계속 무덤을 파 내려갔다.


갈란테아는 주변의 잘려 나간 떡갈나무 밑동에 앉아, 애정 어린 눈으로 위쳐가 파헤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해 달라고 했을 수도 있잖아요..."


위쳐는 성난 눈초리로 갈란테아를 흘겨보았고, 갈란테아는 이에 능글맞은 웃음으로 답했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멋진 기사님이 따로 없네요."


위쳐는 기합 소리와 함께 삽을 땅에 박아 넣으며 다시 한번 흙을 파냈다.


"가서 제 바이올린이라도 가져올까요? 이런 상황에 멋진 발라드가 빠질 순 없잖아요."


위쳐는 숨을 헐떡였다.


갈란테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참, '위쳐'와 라임이 잘 맞는 단어부터 찾아야겠네요..."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 '위쳐'가 아니라 '마독'이겠죠..."


위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갈란테아를 바라봤다.


"저번에 알주르랑 만났을 때, 알주르가 당신 얘길 많이 하더라고요."


위쳐는 무덤에서 나와 삽을 내던지고는, 갈란테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 내 일에 끼어들려는 건가? 계속 날 따라다니면서? 그런 거야? 넌... 알주르의 부하인가?"


"저는 누구의 부하도 아니에요. 우리의 길이 겹친 건 그저 운명의 장난이죠. 그리고 저는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네, 누군지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개소리!" 위쳐는 억지로 웃는 척했다. "뻔하지! 그놈은 자기 통제를 벗어난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하니까. 안 그래?" 위쳐는 조롱하며 말했다. "어떻게든 운명의 실을 조종하려 하지!" 그는 고개를 까닥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결론이 뭐지? 날 어떻게 해 보려고 널 보낸 건가? 내가 다시 그놈 밑으로 기어 들어가기라도 할 거 같아? 꿈도 꾸지 마. 난 알주르의 수하가 아니야. 수하였던 적도 없고. 그러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난 그냥 살인자야. 잘난 거 하나 없는 청부업자라고. 그 이상의 무언가는 될 수 없어."


갈란테아는 위쳐의 분노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 마독...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요?" 갈란테아가 미소 지었다. "그건 그냥 착각이에요. 아니면 아직 모르고 있어서..."


마독이 으르렁거렸다. "감히 나한테..."


갈란테아는 침울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알잖아요, 알주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꺼져!"


"당신은 알주르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예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아직도 가장..."


"난 알주르의 개가 아니야... 놈의 장난감이 아니라고."


"그럼요. 당연히 아니죠."


"제발 나 좀 그냥 놔두라고!"


갈란테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뭐라고 말할지 고민했다. "뭐, 당신 말도 맞죠. 알주르는 집착을 좀 버려야 돼요. 하지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죠." 갈란테아는 마독을 바라보며 살짝 옆으로 비켜 앉았다. "이리 와서 앉아요."


위쳐는 싫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이를 꽉 물고 갈란테아를 노려봤지만, 결국 포기하고 밑동 가장자리에 앉았다.


"과거의 기억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죠?" 갈란테아는 조용히 위쳐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위쳐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지 침묵을 지켰다. 갈란테아는 익살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아, 슬프도다, 내가 괴물이라니! 내가 별종이라니!' 이러면서요. 뻔하죠!"


마독은 갈란테아의 말투에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다 지난 일이에요. 이제 놓아 주세요."


그는 갈란테아를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초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은 저한테 왜 음유 시인 생활을 그만뒀는지 묻곤 했어요. 그리고 저는 항상 대답을 회피했죠. 왠지 아세요?" 갈란테아는 마독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얘기할 가치가 없었거든요. 재미도 없고요. 멋진 모험도 없고, 놀라운 순간도 없고, 화려한 결말도 없었어요. 그냥... 사람들이 싫어하는 뻔한 진실뿐이었죠. 사실 저는 음유 시인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건 그냥 제가 부여한 의무였죠... 과거의 기억을 기리고 싶었거든요.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았어요. 낯선 이에게 노래를 불러 주며, 지겹게 저 바이올린을 켰죠... 참 비참하고 슬픈 일이에요. 자신이 만들어낸 죄책감으로 이어 가는 삶... 혼자만 살아남은 삶이라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든 짐이거든요. 뭐, 그냥 그렇다고요. 제가 괜한 얘기를 했네요..."


위쳐는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속죄하겠다는 부질없는 이유로, 행복한 삶을 스스로 박탈하고 있던 거죠."


"그건 네 탓이지." 위쳐가 중얼거렸다.


"네, 알아요. 근데 그걸 깨닫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죠. 과거가 미래를 좌우하게 놔두면 안 돼요. 이미 사라진 자들의 망령에 집착한다면 인생을 낭비하는 거죠. 그렇게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알주르도 아직 이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오래된 과거에 사로잡혀 집착하고 있죠. 하지만 그게 알주르의 선택이에요. 그리고 마독, 당신도 과거에 묶여 있죠." 갈란테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의 삶을 좌우하는 건 알주르가 아니에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요..."


마독은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겠죠.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아요. 정말로요. 하지만 당신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반대로 생각하면, 당신은 오히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정말 간신히 버티고 있어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이죠. 아무런 꿈도 없이요. 그러다가 "어?" 하면 죽는 거예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요. 하지만 당신은... 어디든 갈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잖아요. 당신은 엄청난 업적을 이룰 수 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기억될 수 있죠. 고작 출신과 고집 때문에 그러한 선물을 포기한다는 건... 뭐, 불우한 사람들에겐 엄청난 모욕일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만 말해 둘게요. 알주르나 알주르의 생각 따윈 다 필요 없어요. 이미 쓰러진 형제도 다 필요 없다고요. 이건 당신의 이야기예요. 더 늦기 전에 운명의 실타래를 부여잡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드세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마독."


위쳐는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그의 눈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갈란테아는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단 그 작업부터 끝내는 게 좋겠네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갑자기 청회색 구름이 몰려들더니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지는 않은 것 같거든요."


Chapter 12


여관 주인이 정문으로 뛰쳐나오더니 진흙탕 속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기적이야! 모두 경배하라!" 여관 주인은 눈을 감은 채, 떨어지는 이슬비를 맞으며 웃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고통받았던가..."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여관 주인은 여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양손에 구리 솥과 냄비를 한가득 들고 있는 하플링과 드워프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마독과 갈란테아는 산비탈 근처에 앉아서, 그릇 비슷한 거라면 죄다 들고나와 빗물을 받으려는 사람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위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퍼져나가는 구름을 유심히 지켜보던 마독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상하군.' 위쳐는 털이 수북한 목을 긁으며 고개를 왼쪽으로 꺾었다. "알주르가..."


잠시 후, 갈란테아가 대답했다. "...네."


위쳐는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화제를 돌렸다. "알주르가... 어떻게 네 저주를 푼 거지? 그 얘긴 안 했잖아."


갈란테아는 질문을 듣고 고심하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해드릴게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서요."


위쳐는 얼굴을 찌푸렸다.


갈란테아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냥 이렇게 얘기해 둘게요. 살다 보면 괜찮은 선택지나 한숨 돌릴 여유가 없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선택을 하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결과를 마주해야 해요. 이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위쳐. 선택의 결과는 절대 피할 수 없어요.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대가를 치러야 하죠." 갈란테아는 동료 여행자들이 여관 밖에서 비를 맞으며 춤추는 모습을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인생에 오점을 남기지 않고 사는 사람은 몇 없어요, 마독.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일찍 죽었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에요."


위쳐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빚이나 다름없군."


"그럼요."


그때,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가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공간을 집어삼켰다.


우르릉!


쾅!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이루어진 눈부시게 밝은 빛이 번쩍였다.


마독은 벌떡 일어나 들판 너머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마리보의 성벽이 물기를 머금은 초원 위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알주르가 뭘 하는 거지?"


머리 위로 커다란 구름이 부자연스럽게 하늘을 가로지르더니, 수도 위에서 불길한 느낌을 띄며 점점 어두워졌다.


그 순간 음산한 풍경 위로 번개가 내리쳤고, 곧이어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슬비는 억센 폭우로 변하고, 산뜻한 바람은 강한 돌풍이 되었다. 저 멀리서 회색과 검은색 구름이 하늘에 뚫린 구멍 주위로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점점 팽창하는 균열에서 구불구불한 빛이 강렬하게 뻗어 나가며 지평선 위로 형형색색의 빛을 드리웠다.


갈란테아와 마독은 교차로에 모여 멀리서 펼쳐지는 혼돈을 지켜보고 있는 여행자들에게 다가갔다.


"안 돼, 안 돼." 하플링이 중얼거렸다. "맙소사..."


"포탈이다!"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드워프가 비명을 질렀다. "엘란더와 똑같아!"


"이... 이런 망할!" 병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 돼..."


멀리 떨어진 폭풍 한가운데에 있는 포탈에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형체가 뱀처럼 내려왔다. 양쪽에 갈고리 모양으로 늘어선 다리가 달린 이 거대한 괴물은 하늘을 뒤덮은 채 몸을 비틀었고, 곧 마리보를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끔찍한 괴물이 불운한 대도시에 떨어지자 대지가 요동쳤다.


커다란 구멍은 닫혔고, 화려한 색상의 빛은 그 자취를 감췄다. 남은 거라곤 검은 구름과 어둠이 드리운 풍경, 간간이 내리쬐는 번개에 비친 거대한 괴물의 검은 형체뿐이었다.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거대한 지네가 도시를 깔아뭉개며 파괴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네가 기다란 상체로 높은 탑을 감싸고 거대한 아래턱을 사용해 마구 씹어대자, 커다란 소리와 함께 탑이 무너져 내렸다.


'망할...' 마독은 생각했다. '정말 개 같네.'


위쳐는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갈란테아를 바라봤다. 갈란테아의 커다란 갈색 눈은 부드럽지만 침울하게 위쳐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가요." 갈란테아가 말했다. "알주르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우리 모두에게도요."


마독은 망설임 없이 말뚝에 매어 둔 말을 풀어주고 안장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고삐를 쥐고 지난번에 자신이 구한 사람들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플링은 냄비로 떨어지는 폭우를 막으려 애쓰고 있었다. 드워프는 쏟아지는 비 때문에 들리지도 않는데 무언가 소리치고 있었다. 병사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여관 주인을 붙잡은 채, 충격에 빠져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갈란테아는 위쳐를 향해 밝게 미소 지었고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은 공포를 숨기려 하고 있었지만 슬픔으로 가득했다.


마독은 고개를 숙여 갈란테아에게 답례하고는, 이내 어두운 길 쪽으로 말을 돌려 박차를 가했다. 마리보를 향해. 어둠을 향해. 번개를 향해. 무자비한 괴물이 대학살을 벌이고 있는 곳을 향해. 파괴와 죽음과 혼돈이 만연한 곳을 향해.


자신을 창조한 자를 향해.


자신의 운명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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